"尹 비례명단에 불쾌"…윤·한 갈등, 결국은 총선 주도권 다툼 [view]
지난 1월 불거졌던 ‘윤·한(尹·韓) 갈등’이 총선을 20여일 앞두고 2라운드를 맞고 있다. ‘이종섭 귀국, 황상무 사퇴’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압박 카드라면 비례대표 사천(私薦) 논란은 대통령실의 반격 카드다. 양측의 신경전이 길어지면서 여권 공멸의 위기감도 커지고 있다.
수면 아래 잠복했던 파열음이 터진 건 국민의힘 위성정당인 국민의미래 비례대표 후보 명단 때문이었다. 19일 여권 내부 인사의 전언을 종합하면 전날 발표된 이 명단을 본 윤석열 대통령은 상당한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선거 개입 논란을 우려한 대통령실이 비례대표 공천 ‘불개입 원칙’을 지켰는데, 돌아온 결과가 기대에 한참 못미쳤다는 설명이다. 여권 관계자는 “비례대표 공천에 관여해 온 역대 대통령과 달리 대통령실은 관행을 깨고 전혀 개입하지 않았다”며 “하지만 자율성을 준 게 오히려 역효과를 불렀다”고 말했다. 친윤 핵심 이철규 의원이 명단 발표 직후 공개적으로 지적했듯 “비대위원 2명이 비례대표에 포함되고, 호남 기반 정치인 배제가 실망스럽다”는 게 대통령실의 기류였다.
특히 윤 대통령과 가까운 주기환 전 국민의힘 광주시당위원장이 사실상 당선권 밖인 24번에 배치된 데 대해 친윤계는 불만을 표했다. 여권 인사는 “비례대표 공천 때 호남 인사를 우선 배려한다는 국민의힘 당헌을 지키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윤 대통령 측근을 일부러 배제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주 전 위원장은 명단 발표 직후 후보직을 사퇴했는데 여권에선 “주 전 위원장의 독단적 판단은 아닐 것”이란 말이 나왔다.
친윤계는 내용뿐 아니라 형식도 문제삼고 있다. 국민의힘 관계자는 “비례대표 명단을 당 지도부가 공식 발표 10여분 전에 대통령실에 보낸 걸로 안다”며 “용산 입장에선 ‘일방 통보’로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공천 과정에서 대통령실과 국민의힘의 가교 역할을 한 이철규 의원도 패싱당했다”고 덧붙였다. 여권 관계자는 “이 의원과 한 위원장이 명단 발표 전 감정이 격앙돼 ‘서로 탈당하겠다’, ‘비대위원장을 그만두겠다’며 충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런 대통령실 주변과 친윤계의 격앙된 목소리를 한 위원장은 적극 반박하고 있다. 한 위원장은 이날 국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지역구 254명과 비례 명단 중에서 단 한 명이라도 제가 추천한 사람은 없다”며 “사천이라고 말하는 건 우스운 얘기다. 굉장히 이상한 프레임 씌우기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비례대표 호남 홀대론’엔 “(명단을) 보고받은 걸 보면 호남 출신 인사가 상당히 포함된 것으로 안다”고 했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의 충돌은 사실 예견됐던 일이었다. 지난 1월 23일 충남 서천에서 윤 대통령을 만난 한 위원장이 ‘90도 인사’를 하며 1차 윤·한 갈등이 이틀 만에 봉합됐지만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그때도 대통령실이 한 위원장을 겨눈 핵심 명분은 한 위원장의 ‘사천’ 논란이었다. 김경율 비대위원을 서울 마포을에 공천하려 한 걸 절차적으로 문제삼았다.
1차에 이어 2차 윤·한 갈등의 본질 역시 총선 주도권 문제라는 게 여권의 평가다. 4·10 총선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대명제는 두 사람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총선을 누가 주도하느냐에 대한 각론에선 입장차를 보인다. 한 위원장은 여러 차례 “선거는 내가 치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면 친윤계 내부에선 “비대위원장을 만들어준 게 누구냐. 윤 대통령 아니냐. 윤 대통령 입장에선 한 위원장이 ‘대리인’ 아니겠냐”는 인식이 강하다. 그만큼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의 인식차가 클 수 있다는 얘기다.
‘수사 회피’ 논란의 중심에 선 이종섭 주(駐)호주 대사와 ‘언론인 회칼 테러’ 발언 파문을 일으킨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 거취 문제도 총선을 대하는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의 입장 차이에서 비롯됐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앞서 한 위원장은 지난 17일 “이 대사의 즉각 소환”을 요구하며 “(황 수석) 스스로 거취를 결정하라”고 촉구했다. 대통령실과 사전 조율되지 않은 발언이었다. 이후 한 위원장은 이날까지 사흘 연속 입장을 고수하며 대통령실을 압박하고 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 관계자는 “국정운영을 잘하기 위해 총선에서 승리하자는 건데 국정운영에 차질을 빚는 문제를, 여당 대표가 공개적으로 제기하는 게 맞냐”라며 “내부적으로 정리할 수 있는 사안을 야당 프레임에 끌려가게 만들었다”고 성토했다. 반면 한 위원장이 이날 “이번에 지면 윤석열 정부는 집권하고 뜻 한 번 펼쳐보지 못하고 끝나게 될 것”이라고 말했듯, 총선에서 승리해야 정상적인 국정운영도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총선 승리 그 자체가 중요하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라는 의미다.
다만 두 사람의 충돌은 근본적으로 윤 대통령에게 불리하다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자칫 ‘총선 개입’ 논란이 불거질 수 있기에 대통령실이 공개적으로 사안을 뒤집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친한계 인사들은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 뜻이 다르다는 건 친윤계의 호가호위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런 만큼 한 위원장은 당분간 ‘마이 웨이’를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이기도 한 한 위원장은 이날 선대위 발대식에서 “정부와 집권 여당은 조금이라도 오만하거나 국민 앞에 군림하려는 모습을 보였을 때 감당할 수 없는 큰 위기가 왔었다”고 강조했다. 듣기에 따라 ‘현 정부가 오만하다’고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었다.
수도권 격전지에서 ‘이종섭·황상무 리스크’에 대한 부정적 민심을 겪고 있는 총선 후보들은 연일 한 위원장에 힘을 보태고 있다. 인천 동·미추홀을 후보인 윤상현 의원은 “살을 내주더라도 뼈를 취하는 육참골단(肉斬骨斷)의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했고, 서울 중·성동갑 출마자 윤희숙 전 의원도 “나라의 미래와 대통령, 윤석열 정부의 성공을 위해서 두 분의 자발적 사퇴가 필요하다”고 했다. 서울 종로 후보인 최재형 의원은 한 발 더 나아가 “이관섭 비서실장의 교체 등 대통령실의 전면 쇄신”을 촉구했다
윤 대통령과 한 위원장의 갈등이 확인되고 있지만, 총선이 20여일 남은 만큼 양측은 확전을 자제하고 있다. 전날 공개 반발했던 이철규 의원은 이날 기자들과 만나 “(전날 페이스북에 쓴) 글자 그대로 보라”며 말을 아꼈다. 권성동 의원도 “친한동훈계니 윤석열계니 이런 식으로 프레임을 걸어서 자꾸 싸움 붙이듯이 하지 말라”고 했다.
국민의미래도 이날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열어 친윤계가 문제삼은 비례대표 순번 17번이었던 이시우 전 국무총리실 서기관의 공천을 취소했다. 전날 이철규 의원은 “생소한 이름의 공직자 2명이 당선권에 포함된 상황”이라며 사실상 이 전 서기관을 직격했다. 이 전 서기관은 지난해 ‘골프 접대’ 의혹으로 4급(서기관)에서 5급(사무관)으로 강등됐던 사실도 알려졌다.
다만, 호남 홀대 논란은 여전히 남은 갈등의 씨앗이다. 국민의힘 전북 후보자 일동은 이날 긴급 성명을 통해 “기대했던 전북 현장 정치인에 대한 배려는 전혀 없었다”며 “전북 지역 총선 출마자들은 이 부당한 처사가 시정되지 않을 경우 선거 운동을 모두 중단하고 후보직을 전원 내려놓겠다”고 했다.
허진·심새롬·박태인 기자 b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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