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회칼, 의료개혁, 진정성
코리아 중앙데일리 기자로 고(故) 노무현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출입했을 때다. 대통령은 ‘진정성’이란 단어를 애용했다. 영어 번역이 고역이었다. 직역도, 의역도 어색했다. 미국인 에디터들도 갸웃했다. 어색한 번역 대신 한국에만 있는 개념인 전세(‘jeonse’)라는 말처럼 ‘jinjeongseong’으로 표기하자는 제안까지 나왔다. sincerity(진심) 같은 단어로 옮기기도 했지만, 문맥 이해에 지장이 없을 경우엔 아예 생략해버리기도 했다.
진정성이란 단어는 어느새 일상용어로 자리 잡았다. 총선을 앞두고는 여러 입장문에 단골로 등장한다. “사과를 진정성 있게 한다면(후략)” “정부도 진정성 있는 대화 테이블에 나와야” 등. ‘진정성 대잔치’까지 벌어진 듯하다. 그런데 그 진정성의 진정성이 쉬 납득 안 가는 건 나뿐일까. 의료 개혁이 특히 그렇다. 대화로 문제를 풀려는 의지보다는 상대방 듣지 않는다는 호통으로 느껴지기 일쑤다. 영화를 보러 갔더니 웬만한 영화 수준의 감정선과 영상미를 살린 보건복지부의 의료개혁 홍보 영상이 나온다. 그런 영상을 만드는 것보다 의사들과 ‘진정성 있는’ 대화를 하면 어땠을까.
의료개혁 필요성엔 공감한다. 마음은 급한데 응급실 다섯 군데에서 “병상이 없으니 다른 곳 가봐라”고 퇴짜 맞았던 기억이 새롭다. 멈춰지지 않는 피를 보면서 의료 현장이 바뀌긴 바뀌어야겠다고 절감했다. 문제는 왜 하필 지금, 왜 하필 이런 식인지다. 소수의 기득권 또는 특권층을 공격해서 다수의 표를 얻으려는 정치적 계산법만은 아니기를, 진정 바란다.
최근 정치계와 언론계의 단연 화제인 회칼. 언론계 출신의 정치인이 이런 표현을 썼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지만, 그 이후 행태도 실망스럽다. 달랑 넉 줄짜리 사과문은 진정성과는 거리가 진정 멀다. ‘토착 왜구’ 같은 악플이나 욕설로 가득한 이메일은 이제 익숙하지만, 회칼 테러는 상상만 해도 오싹하다.
민주당인들 문제없는가. SNS에서 고 채수근 해병을 ‘채 상병 상병’이라고 한 모 후보는 또 어떤가. 그것도 처음엔 ‘채상병 일병’이라고 적었다가 고친 것이란다. “바빠서 그랬다”는 해명에는 진정성의 ‘ㅈ’도 찾기 어렵다.
어딜 봐도 진정성은 역시 신기루인가 싶은, 총선 D-20 풍경이다. 21세기 하고도 24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속이 타들어 가는 환자와 가족들 머리 위로 ‘진정성’ 유령이 떠돌고 있다.
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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