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호근의 세사필담] 명예로운 퇴로를 허하라
의료계가 포위됐다. 사면초가다. 정부의 화력은 막강하고 어지간해서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검찰 정권답다. 총선 D-21일, 잘못했다간 괜한 역풍을 맞을까 야당도 거들지 않는다. 의료계의 화력은 진작부터 고갈됐다. 사회 저변에 동맹군이 없다. 의사 증원엔 박수갈채가, 현장 이탈 전공의와 사표 불사 교수들에겐 비난이 쏟아진다. 고립된 성곽 안에서 교수, 전공의, 학생의 항쟁 결의 함성이 크게 진동할수록 진압군의 으름장은 더 거세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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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립된 성곽에 포위된 의료계를
몰살 혹은 투항으로 내몰면 곤란
정부 후속조치와 의료계 각성이
우수성과 편익성을 살리는 열쇠
」
면허 취소, 재취업 금지, 협상 불가. 꼭 이래야 하나? 세계적 수준의 한국 의료, 그 전선을 지켜온 의료계를 궁지로 모는 방법밖에 없었을까. 의사 절대 부족에 지역 편중, 전공 편중, 필수 의료 고사 현실을 외면한 것은 의료계의 책임이다. 그래도 ‘2000명 증원’이 누적된 의료계 모순을 일시에 해소하지는 못한다. 정부가 의대 증원을 불쑥 발표했을 때 필자는 콧대 높은 의료계와 사전 타협이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했다. 세부 타협안에 더 관심이 갔던 이유다. 그런데 텅 비어 있었다. ‘왜 2000명인가’라는 의료계의 항의에 정부는 아예 귀를 닫았다. 대신 의대가 있는 대학 총장들에게 손을 벌렸다. 얻어낸 것은 총장의 충성심과 허수가 잔뜩 낀 3401명. 정부는 이 숫자에 환호작약했다. 전국 의대의 최대 수용력을 두 배 넘는 수치다.
이 숫자 정치에 파괴되는 것이 다름 아닌 한국 의료의 우수성과 편익성이다. 의사가 제공하는 우수한 진료를 구매자가 값싸고 편리하게 산다는 점에서 한국을 따라올 나라는 없다. 양자의 미세 균형을 맞추는 의료규제 법령집은 벽돌만큼 두껍다. 100년쯤 지나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 등록됨 직하다. 그런데 양자는 항상 길항적이다. 서로 다툰다. 이 미세 균형을 잘못 건드리면 파탄이 난다.
25년 전 의약분업 파동 때 수가 조정과 정원동결 조치를 동시에 선물해서 겨우 의료계 반란을 진정시켰다. 이번 사태 폭풍의 눈인 전공의 1만2000명이 현장을 이탈했다. 몸값이 현격히 하락함은 물론 월봉 350만원에 주 80시간 근무를 두말없이 해냈던 극단적 현실을 개선할 약속이 없다는 호소다. 유격훈련이 지나면 억대 소득 초원이 펼쳐질 텐데 웬 엄살? 말은 맞는데 이런 냉소와 질책이 자칫 한국 의료의 우수성을 망가뜨린다. 의사의 지역 안배 유인책과 수가 조정 없이 필수 의료 회생은 공염불이다. 수가는 의료계의 중추신경이고, 수요자에겐 건보료 인상의 뇌관이다. 정치적 리스크가 폭발한다. 이를 제쳐둔 숫자 정치는 내부 모순을 은폐하고 의료공급자를 나쁜 나라로 낙인찍는 위험한 작란(作亂)이다.
이 볼썽사나운 낙인찍기 습관은 한국 특유의 고정관념에서 비롯됐다. ‘의대 증원=의사 증원’. 해방 이후 한 번도 도전받지 않은 이 구태의연한 명제는 80년이 지난 지금 한국 의료의 우수성을 훼손하는 독약이 됐다. 최고 인재가 몰리는 한국의료계는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서 백신 하나 못 만들어냈다. 의과학자, 의공학자는 여전히 희귀한 존재다. 다급해진 정부가 간호사에게 의뢰 중인 PA(수술보조)만 해도 그렇다. 마치 법조계에 변호사, 변리사, 법무사, 행정사 등 직업군이 분화돼 있듯이, 의료 현장에도 전문의, 전공의, PA, 여타 처치 보조사가 필요하다. 의과학자, 의공학자 배양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직업군을 모두 의대 증원에 포함한다면 연 3000명 증원도 부족할 판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울대 의대의 대응은 적합했다. 의대 15명 증원에, 신설 의과학과 50명을 신청했다. ‘의대 증원=의사 증원’이라는 케케묵은 등식을 깨뜨리라는 신호였다. 이런 시그널을 제대로 수신해야 우수성과 편익성을 동시에 살려낸다. 급기야 서울대, 연대 의대교수들이 25일 일괄사표를 제출한다고 결의했다. 25일은 면허정지 사전 통보를 받은 전공의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마지막 날이다. 몰살 아니면 투항. 교수들이 눈물로 호소하고 있다. 제발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아산병원을 방문한 대통령이 필수 의료 10조 지원에 수가 조정을 약속했다. 정치적 리스크 때문에 역대 정권이 피해간 필수 개혁을 해내자고 호소하기도 했다. 끝까지 하겠다는 뜻이다. 믿지 못하는 의료계, 그것보다 더 본질적인 타협안을 요구하는 의료계의 항쟁을 거들 사람도 없고 눈물을 닦아줄 사람도 없다.
교수 사퇴가 정작 현실화하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거기까지 사태를 몰아가서는 곤란하다. 굴욕적 투항 말고 명예로운 퇴각을 할 수 있도록 조건과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우리는 도둑놈을 키웠다!’는 25년 전 의약분업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 전신)의 저 저속한 슬로건에 멍든 것은 비단 의료계뿐이 아니다. 한 해에만 건보 적자 3조가 났다. 왜곡된 구조를 방치해온 역대 정권의 반성은 필수적이다. 여기에 끝도 없는 내부 모순을 그냥 체념해온 의료계가 화답할 차례다. 한국 의료가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선 것은 의사와 환자, 공급자와 수요자가 서로의 처지와 애로를 공유했기 때문이다.
송호근 본사 칼럼니스트·한림대 도헌학술원 원장·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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