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주의 시선] 정치의 봄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임종주 2024. 3. 20.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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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주 정치에디터

그다지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봄 날씨는 도통 종잡을 수 없을 때가 많다. 따사한 햇살이 한껏 부푼 꽃망울로 시선을 유도하는가 싶더니 일순 차갑게 변심한 춘풍이 옷깃을 여미게 한다. 물론 우리만 그렇게 별난 것도 아니다. 십수 년 전 두어 차례 경험한 북부 독일의 봄도 천기가 오락가락하기 일쑤였다. 겨우내 우중충했던 하늘을 뒤로하고 봄맞이 나섰던 독일인들은 “왜 이렇게 날씨가 변덕스러우냐”며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영화 '서울의 봄' 포스터. 플러스엠 엔터테인먼트


1300만 영화 ‘서울의 봄’이 그린 44년 전 봄날의 정치 풍경은 날씨 변덕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하 수상했다.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봄이 온 것 같지만, 진짜 봄이 아니란 뜻입니다. 봄이 오기도 전에 옷을 벗으면 감기에 걸리고 폐렴이 돼 죽을 수 있습니다”(『김종필 증언록:소이부답』). 1980년 2월 25일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3김이 함께한 자리에서 김종필은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김종필이 쓴 그해 신년 휘호는 '유수부쟁선'(流水不爭先, 흐르는 물은 앞을 다투지 않는다)이었다. 한 시절을 풍미한 보수 정객은 어떤 파란과 과욕을 경계하고자 했던 것일까.

이렇듯 비유적이고 함축적인 표현은 늘 해석의 여백을 남긴다. 그 안에서 화자의 의도와 청자의 해석이 조우하면 의미 작용은 비로소 공유되고 커뮤니케이션은 성공에 이른다. 엊그제 화이트데이에 연인들이 장미꽃을 사이에 두고 환하게 얘기꽃을 피웠다면, 장미는 사랑의 의미로 발전해 봄을 향해 날아간다. 철학적 해석학의 거장 가다머로까지 범위를 확장하면 해석자의 지평과 전통의 지평 간 물음과 대답, 즉 '지평융합'을 통해 새로운 지평은 열린다. 수수께끼의 미로에서 깨닫는 이치는 직설과 성급함으로는 맛보기 어렵다.

선문답도 그 같은 사례다. 주위의 소란에 들뜨지 않고 찬찬히 의미의 여백을 곱씹다 보면, 어느 순간 속뜻이 환하게 드러난다. 옛날 중국에서 나병으로 고통받던 승찬이 선승 혜가를 찾았다. “저의 죄를 씻어주시옵소서.” 혜가가 말했다. “너의 죄를 가져오너라. 그러면 씻어주마.” “아무리 찾아도 죄가 어디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너의 죄를 씻어주었다”(『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선문답』). 그저 마음이 죄라고 여길 뿐 본래 죄는 없다는 혜가의 가르침에 승찬은 마음의 병을 씻고 선승의 길을 걷게 됐다.

1981년 1월 제40대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 선서하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부인 낸시 여사. 연합뉴스


트럼프 시대를 거치면서 민주주의 퇴행을 겪는 미국 정치도 한때는 위트와 여유가 넘쳤다. 재치있고 능란한 화법은 충돌과 갈등이 일상인 정치 세계에 윤활유 역할을 톡톡히 했다. 배우 출신으로 타이밍을 놓치는 법이 없던 대통령 레이건은 어느 날 연회에서 “골프 핸디캡(악조건)이 어떻게 됩니까?”라는 질문을 받고는 ‘의회’라는 답을 내놨다. 속마음을 골프 대화에 녹여 은유적으로 표출한 것이다. “정치라는 벰과 베임의 현장에 서 있는 검객에게 웃음은 유연성 같은 것이다. 그런 여유가 결여되면 진검을 들고 목검에 베인다”(『대통령의 위트』).

한국 정치에서 이런 해석의 빈칸을 찾으려는 시도는 사치에 가깝다. 뜸 들일 여유가 제거된 시공간에선 상대를 서로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증오의 언어만이 서로 날카롭게 부딪친다. 유머나 해학, 촌철살인의 기지는 자취를 감췄다. 타협과 절충으로 합의를 끌어내는 민주주의 메커니즘은 진즉에 고장 났다. 지평 간 이해를 통한 새 정치로의 항해는 헛된 꿈이 되다시피 했다.

4·10 총선을 앞둔 선관위 모의 개표. 프리랜서 김성태


자극적 막말과 네거티브 선거는 덧난 상처를 더 헤집는다. 공천 취소로 이어진 “목함 지뢰 밟으면 목발 경품”(정봉주 전 의원), “5·18 북한 개입 여부 문제는 상식”(도태우 변호사) 등의 과거 설화까지 뒤엉켜 유권자의 눈과 귀를 어지럽힌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설마 2찍(국민의힘 지지자 비하 용어) 아니겠지” 발언과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의 ‘언론인 회칼 테러’ 운운이 고질적인 대결 구도와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 극단의 정치 키우는 막말과 비방
총선 이후 통합과 화합의 길 요원
정치 개혁 비전과 약속 제시해야

선거 후가 더 걱정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깊어질 대로 깊어진 정치적 갈등의 골은 자연 치유가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불행의 구조적 씨앗부터 제거하는 게 순리다. 양당의 적대적 공생을 고착화한 소선거구제와 꼼수 위성정당을 낳은 기형적 준연동형제에 대한 전면 재검토가 그 시작일 터이다. 여야는 22대 국회 출범 즉시 정치 개혁에 착수하겠다는 약속과 관련 권한의 독립적 기구 위임을 국민 앞에 천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새 정치 공약도 사탕발림에 불과할 뿐이다. 정치의 봄은 춘분 돌아오듯 저절로 오지 않는다.

임종주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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