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아의 행복한 가드닝] 땅이 풀리듯이
보름간의 해외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마당을 서성였다. 서둘러야 할 일이 있었다. 작년 늦가을 때를 놓친 알뿌리를 이제라도 심어줘야 했다. 땅이 녹아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응달엔 아직도 눈이 쌓여있어 불안했는데 막상 땅을 파니 푹신하게 삽이 들어갔다. 만물이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을 넘겼으니 아직 눈은 있어도 땅이 벌써 훈훈해졌다는 의미였다.
사실 땅이 얼었다 녹는 일은 온대기후를 지닌 땅만이 누리는 축복이기도 하다. 한번 언 땅은 쇠꼬챙이로 쑤셔도 들어가질 않는다. 심지어 온도가 아무리 일시적으로 따뜻해져도 겨울엔 절대 이 땅이 녹지 않는다. 이건 바깥 기온과는 별도로 땅 스스로 온기를 머금어 주지 않으면 얼음이 녹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말로는 이 녹는 현상을 ‘땅이 풀린다’고도 하는데 나는 이 표현을 참 좋아한다.
이건 단순히 눈이 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진짜 무엇인가가 풀린다. 우선 눈 속에는 공기 중의 질소·산소 등이 들어 있다. 이게 눈 속에 갇혀 있다 물이 되면서 자연스럽게 땅에 풀려 식물들이 흡수할 수 있는 영양분이 된다. 또 딱딱한 흙이 얼음으로 팽창이 되었다 녹으면 흙에 공기구멍이 생긴다. 두부를 냉동실에 넣었다가 빼내면 수분이 있던 곳에 구멍처럼 공기층이 생기는 것과 비슷하다. 이 공기구멍으로 성장하는 식물의 뿌리가 뻗어나간다. 이 모습도 분명 뭔가 풀려나가는 모습일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 녹은 물이 흙 알갱이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부풀어 오르면 굳이 쟁기질을 하지 않아도 땅 스스로 일굼이 일어난다.
새벽부터 시작했지만 튤립·수선화·히야신스의 알뿌리를 다 심고, 원예 상토를 덮어주고, 물을 주고 나니, 해질녁에서야 정원일이 끝났다. 허리를 펴기도 어려울 정도로 온몸이 뻐근하지만, 땅이 풀렸으니 그 위의 식물도 잘 자랄 것임을 믿는다. 그리고 나의 삶도 이 봄, 부드럽고 뽀송하게 잘 풀어질 것이라고도 믿는다.
오경아 정원디자이너·오가든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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