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도너번의 마켓 나우] 인플레이션이 주는 ‘느낌’이 중요한 이유
2002년 유로화가 도입되자 많은 이탈리아인이 격분했다. 인플레이션이 통제 불능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룻밤 사이 밀라노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이 0.52 유로(1000리라)에서 1.00유로로 뛰어올랐다. 이탈리아인은 에스프레소를 즐겨 마신다. 그들은 카페에 들를 때마다 물가가 가파르게 오른다고 느꼈다. 다른 물품 가격은 오르지 않거나 아주 약간만 올랐지만 연일 오르는 에스프레소 가격에 높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착각에 빠졌다.
이탈리아에서 벌어졌던 일은 경제적으로는 문제없는 수준의 인플레이션이 왜 정치적으로는 문제인지 잘 보여준다. 올해처럼 전 세계 수많은 사람이 투표에 참여하는 해에는 정치권이 인플레이션을 어떻게 논란으로 키우는가에 따라 금융시장도 매우 큰 영향을 받는다.
사람들은 자주 구매하는 물건의 가격은 잘 기억하지만, 가끔 구매하는 물건의 가격은 쉽게 잊어버린다. 오늘날 일부 품목의 가격은 실제로 내려가고 있다. 한국에서 텔레비전 가격은 2019년과 비교하면 약 15% 저렴해졌다. 그러나 한국의 가구당 평균 식비는 2019년에 비해 30%나 올랐다.
일상 소비재 품목들은 종종 편의를 위해 가격을 ‘반올림’ 처리한다. 이는 구매 빈도가 높은 물건들의 가격 인상 폭이 더 커지는 결과를 낳는다. 이탈리아에서 1000리라 동전을 대신해 1유로 동전을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 카페 주인 입장에서는 신속한 서비스를 위해 에스프레소를 사는 손님이 동전 하나만 내도록 하는 것이 편했다. 손님 입장에서는 가격이 낮은 품목이 큰 폭으로 인상된 대표적인 사례다. 미국에서는 자판기에서 판매하는 식품의 가격 인상 폭이 전체 물가 상승률의 4배를 웃돈다. 가격은 센트보다는 달러 단위로 움직이는 경향이 있고, 달러 단위로 가격이 올라가면 가격 상승 폭도 큰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물가가 과거 수준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자주 구매하는 품목의 가격이 오르면 소비자는 과거의 가격을 오랫동안 기억한다. 최대 18개월까지도 기억한다는 조사 결과가 있다. 소비자는 자신이 ‘공정’하다고 기억하는 가격보다 물건의 가격이 더 높으면 불만을 품는다. 소비자도 시간이 흐르면서 공정한 가격에 대한 생각이 바뀌지만, 이는 신속한 과정은 아니다.
이런 다양한 요인 때문에 많은 유권자가 인플레이션이 실제보다 높다고 여기며 불만을 갖게 된다. 정치인이 인플레이션 지표들을 잘 살펴본다면 인플레이션이 통제되고 있음을 알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물가가 적정 수준이라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은 투표소에서 정치인들을 응징할 것이다.
폴 도너번 UBS 글로벌 웰스 매니지먼트 수석 이코노미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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