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사회 저항하는 춤추는 ‘사다리 로봇’… 청춘 닮지 않았나

손영옥 2024. 3. 19.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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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인디밴드 스타 ‘올해의 작가’된 권병준
국립현대미술관이 수여하는 ‘올해의 작가상 2023’ 최종 수상자 권병준 작가가 지난 12일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마련된 전시장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며 춤추는 로봇 작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권현구 기자


국립현대미술관이 매년 4명의 후보를 선정한 뒤 최종 한 명에게 상을 주는 ‘올해의 작가상’은 미술계의 과거 급제로 통한다. 그만큼 권위 있는 ‘미술계 어사화’를 쓴 권병준(53) 작가는 ‘미술관에 상주하는 작가’로 통하며 관람객의 사랑을 받았다. 두 번 세 번 전시장을 찾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오체투지 로봇, 춤추는 사다리 로봇, 외팔이 부채춤 로봇…. 그날도 그는 신기한 로봇들이 조명을 받으며 춤을 추는 전시장으로 출근했다가 국민일보 인터뷰에 응했다.

“어쩌지요. 두 시간 전에 외나무다리에서 춤추는 ‘무동 로봇’의 팔이 떨어져 나갔어요. 아쉽게도 지금은 이 로봇의 춤은 보여드릴 수 없게 됐네요.”

지난 12일 만난 작가는 어두컴컴한 전시장 안쪽으로 성큼 걸어가 작은 문 뒤로 기자를 안내했다. 그러곤 한 평 남짓 작은 공간에 차려진 테이블 위 널브러진 부품과 전선 위에서 로봇의 팔 한 짝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서울 종로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진행 중인 ‘올해의 작가상 2023’ 수상자 전시회는 31일 종료된다. 갈라 포라스-김, 이강승, 전소전 등 다른 경쟁 후보를 제치고 지난 2월 최종 수상자로 낙점된 권 작가는 지난 10월 하순 이 전시가 개막된 이래 5개월여 동안 매일 이곳으로 출근했다. 전시장 안에 스튜디오를 차린 것이다.

“이 무동 로봇은 이제 태어난 지 한 돌이 됐어요. 너무 연약해 돌봄이 필요하거든요.”

오십견이 와 불편해진 한쪽 팔을 자꾸 만지며 이렇게 말하는 작가에게서 로봇을 인간처럼 대하는 부성애가 묻어났다. 그런 그가 인디음악 밴드의 전성시대인 1990년대 KBS TV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해 악쓰듯 ‘옛날 사람’을 불렀던 ‘원더버드’, 그리고 ‘삐삐롱 스타킹’의 멤버(고구마)였다니 상상이 안 갔다. 서울대 불문과를 나온 뒤 인디음악에 빠졌던 20대의 반짝이던 시절을 통과한 그가 이제 50대 중년이 되어 춤추는 로봇 작품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심장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전시하기까지 어떤 사연이 있었던 걸까.

청춘들을 위로하기 위해 기성품 사다리로 만든 로봇들인데, 이들 '춤추는 사다리들'은 수평적 사회를 꿈꾸듯 옆으로 밀면서 함께 춤을 춘다. 권현구 기자


그는 2005년(34세) 홀연 네덜란드로 유학 갔다. 헤이그 왕립음악원 대학원에서 아트사이언스로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현지의 전자악기 연구개발기관인 스타임(STEIM)에서 하드웨어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건 2011년이다. 귀국 후 공연계에서 일했다. 그는 “제가 만든 전자 악기가 무대에 쓰이고 그것이 확장돼 지금으로 로봇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스스로 무용수가 돼 외나무다리를 건너는 퍼포먼스를 하기도 했다. 이제 인간인 자신을 대신해 분신 같은 로봇이 외나무다리 위에서 춤을 춘다.

귀국 초기엔 지역의 농부와 기술 워크숍을 하기도 하고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과 전자 악기를 만들기도 하는 등 커뮤니티 활동을 했다. 불현듯 “나를 위한 작업을 하고 싶었다”는 그는 2017년부터 개인 작업으로 무게중심을 옮겨왔다. 2018년에 와서야 홍대 근처의 대안공간 루프에서 첫 개인전을 했다. 12개 로봇이 춤을 추는 전시였다.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군무를 추는 로봇들은 취객, 고물상, 걸인 등 사회의 패자를 형상화했는데, 모두 외팔이라는 게 특징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 나온 로봇들도 팔이 한 짝이다. 부채춤 로봇도, 외나무다리 무동 로봇도 그렇다.

“예산이 부족해 그렇지요. 예산이…. 돈이 부족하다 보니 팔을 한 짝밖에 만들 수 없었답니다.”

그런데 돈이 모자라 탄생한 ‘장애 로봇’은 역설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동시대 예술의 최전선으로 부상 중인 장애예술과 이어지게 됐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는 한국 사회 약자들의 인생에 관심이 많다. 가장 인기 있는 ‘춤추는 사다리들’ 로봇은 청춘들에 비치는 로봇이라고 했다. “사다리는 높은 곳에 올라가려는 누군가를 받쳐주는 도구이며 쓰지 않을 때는 창고에 처박히는 신세가 된다. 한국의 청춘들이 그렇게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사다리로 로봇을 만들고 싶었다”라고. ‘춤추는 사다리들’ 로봇은 수직 사회에 저항하듯 옆으로만 이동하며 함께 춤을 춘다.

전시장에 나온 로봇들은 또한 전통에 닿아 있다. 외나무다리 로봇은 남사당패, 백댄서 로봇은 장승, 부채춤 로봇은 전통춤을 연상시킨다. 이는 K-컬처의 시대 순수미술판에서 권병준을 주목하는 요소가 되었을 것이다.

전시장 입구에는 권병준의 모색기를 증거하는 헤드셋이 있다. 머리에 꽂으면 특정 장소에서 채집한 소리가 나온다. 그는 귀국 이후 한때 소리를 채집하는 활동을 했다. 2018년 예멘인들이 무비자로 입국해 집단 난민 신청했을 때 그들의 목소리를 담으러 제주에 갔다. 2019년에는 홍성 다문화가족을 찾아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기억하는 자장가를 채록하는 프로젝트를 했다. 청각으로만 기록하는 이 작업은 시각 중심 미술에 균열을 냈지만, 반응이 미지근했다. “보다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자 싶었고, 그래서 정말 한쪽 팔을 내미는 로봇을 제작하게 됐다”고 작가는 말했다. ‘로봇 춤’을 내세워 기계와 미술, 음악, 연극을 아우르는 뉴미디어 퍼포먼스로 한국미술의 새 장을 열기까지 걸어온 여정을 외나무다리를 탄 로봇에 비유하는 작가의 말에 공감이 갔다.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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