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태어난 게 죄'라는 고3의 선택... 교사는 화가 난다
[서부원 기자]
▲ 지난 13일 자 <문화일보> 기사 "[단독] 강남3구 서울대 합격자, 광역시의 3~9배" |
ⓒ 문화일보 |
"지방에서 태어난 게 죄죠."
올해 서울대 합격자 중 서울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등 이른바 '강남 3구' 출신이 다른 지역 광역시 합격자 수의 약 3~9배에 이른다는 뉴스를 접한 고3 준우(가명)가 푸념을 늘어놓았다. 풀 죽은 그의 말은 분노보다 체념으로 가득했다. 딱히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이야기가 슬펐다.
강남 출신이 의치대와 서울대 등 명문대를 독식하고 있다는 건 삼척동자도 안다. 지방 출신이 명문대에 진학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가 된 지 이미 오래다. 지방 소재 특목고와 자사고를 제외하면, 학교마다 합격자 수는 한 손에 꼽는다. 강남 출신이 본다면, 말 그대로 '도토리 키재기'다.
강남의 명문대 독식은 나아지기는커녕 해마다 악화일로다. 올해 서울대 합격자 8명 중 한 명이 강남 출신으로 드러났다. 아이들 사이에선 '강남의 하찮은 일반고가 지방의 일류 자사고보다 낫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하다. 강남에서 태어났다는 건 출발선부터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 '부모 잘 만난 것도 실력'이라는 말과 상통한다.
고액의 사교육을 통해 대입을 준비한 당연한 결과라는 분석에 이견이 없다. 학생부종합전형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수능 위주의 정시 비중이 올라가면서 쏠림 현상이 더욱 두드러졌다는 주장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별반 차이가 없다. 대입 전형이 어떻게 바뀌든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의 위세는 굳건하다.
수능에 킬러 문항 출제를 배제한다며 한바탕 소동을 벌였던 지난해의 사교육비 지출이 역대 최고치를 찍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킬러 문항만 없애면 사교육에 의존하지 않을 거라는 정부의 어이없는 발상에 온 국민이 코웃음을 쳤다. 애꿎은 수험생들만 '킬러 문항 없는 역대급 불수능'에 곤욕을 치러야 했다.
현재 사교육을 받지 않는 고등학생은 거의 없다. 방과 후 교문엔 줄지어 선 학원 버스들로 장사진이고, 야간자율학습이 끝난 야심한 시각에도 곧장 집에 가지 않고 스터디 카페 등을 찾는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 수업이 이어지고, 학원에서 나오면 인터넷 강의를 듣는 일상이 반복된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서울대 진학을 염두에 두는 건 아니다. 입으로야 '수능 대박'을 주문 외듯 하지만, 스스로 언감생심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올라가지 못할 나무 쳐다보지도 않는다'는 준우의 말에 마주 보며 겸연쩍게 웃었다. 그는 지방에 사는 아이들에게 '인 서울'이면 모두 서울대라고 했다.
'주위 환경'이 달라졌다
"누구나 대입을 위해 사교육을 받지만, 명문대에 가려면 '강남 사교육'을 받아야 한다잖아요."
그는 '강남 사교육'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고 했다. 막연히 '강남 사교육'은 여느 곳과 다를 거라고 했다. 여건만 허락되면 당장이라도 짐을 싸서 올라갈 거라며 웃어 보였다. 그에게 강남은 단순히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바늘과 실처럼 따라가는 사교육 불패의 수식어이자 '유토피아'와 동의어다.
▲ 지난 14일 자 <조선일보> 기사 "어디 가? 의대 가? 서울대 신입생, 입학 일주일만에 119명 휴학" |
ⓒ 조선일보 |
그런 그가 요즘 들어 '희망'에 부풀어 있다. '인 서울'을 향한 오랜 꿈이 최근 명문대 진학으로 상향됐다고 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 허무맹랑한 꿈이라 치부했던 명문대 진학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워지고 있다며 설레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의 내신 등급과 모의평가 점수는 그대로인데, '주위 환경'이 달라졌다는 거다.
정부의 느닷없는 의대 증원 방침이 일선 학교에 몰고 온 '나비 효과'다. 당장 올해부터 의대 정원을 2천 명 늘리겠다는 정부의 발표에 전공의들이 대거 파업에 나서는 등 의료 대란이 현실화하고 있지만, 수험생들은 이에 아랑곳없이 '주판알'만 튕기고 있다. 의대를 향한 'N수생'과 최상위권의 도전으로 학벌의 연쇄 이동이 불가피해졌다고 본다.
예상했던 대로 그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올해 개강하자마자 전공 학부와 상관없이 서울대 신입생들의 휴학 신청이 폭주하고 있다는 보도다. 심지어 반도체 전문 인력 양성이라는 현 정부의 역점 시책에 따라 신설된 첨단융합학부조차 지난 8일 현재 정원의 7.4%에 해당하는 17명이 휴학계를 냈다고 한다.
대부분은 의대 진학을 준비하기 위한 '반수' 목적의 휴학이다. 이미 수험생들 사이에서 서울대 공대는 '의치대 사관학교'로 불려온 터다. 휴학계를 내려면 반드시 1학기를 이수하도록 한 여느 대학에 견줘, 서울대는 학적을 둔 채 1년을 온전히 입시 공부에 쏟을 수 있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 지난 2월 29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에서 열린 입학식에 앞서 직원이 신입생들을 축하하며 토퍼를 나눠주고 있다. |
ⓒ 연합뉴스 |
"서울대의 '의대 침공'이 본격화되었으니 연고대의 '서울대 침공'으로 이어질 테고, 그러자면 제게도 꿈꿔온 명문대 진학의 기회가 열리지 않겠어요?"
그에게 의치대와 서울대생은 애초 경쟁 상대가 아니라고 했다. 그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채울 '이삭줍기'일 뿐이라며 겸손해했다. 서울대생이 의치대에 가고, 연고대생이 서울대로 옮겨가면, 비인기 학과라도 명문대 로고가 새겨진 '과잠'을 입는 행운이 찾아올지도 모른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는 '대학의 간판보다 전공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사회에서 의미 있는 전공은 오직 하나 '메디컬'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과학 영재들이 모인다는 서울대 공대조차 의치대에 눈이 팔려 강의실이 텅 비어가는 현실에서 전공 운운하는 건 흰소리라고 했다.
'취업'이라는 말의 의미도 과거와는 180도 달라졌다고 덧붙였다. 또래들 사이에서는 '취업'이 '알바'와 비슷한 뜻으로 통용된다고 했다. 어차피 비정규직이 보편화하고 인공지능(AI)이 인간의 단순노동을 빠르게 대체하는 상황에서 '취업'은 기업이 필요할 때 잠깐 쓰이다 버려지는 일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는 거다.
요즘 아이들은 변호사나 의사 등의 전문직만이 미래의 삶을 보장해 줄 수 있다고 철석같이 믿는다. 'SKY 서성한 중경외시…'라는 학벌 서열 위에 '문과생은 로스쿨, 이과생은 의치대'라는 불문율이 우뚝하다. 서울대 공대와 지방 의치대에 동시 합격한 아이에게 어디를 선택할 건지 묻는 것만큼 어리석은 질문은 없다.
정부의 갑작스러운 의대 증원 방침으로 서울행에 들떠있는 준우를 보며, 새삼 우리 대학의 민낯을 들여다보게 된다. 소수의 강남 출신이 명문대를 독식하고, 그들이 또다시 의치대로 갈아타며 학벌 구조의 맨 꼭대기에서 승승장구하는 현실은 우리 대학이 심각한 기능 부전의 상태에 빠져있음을 방증한다. '지성의 요람'은커녕 사회적 퇴행의 주범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준우는 스스로 성골과 진골 아래의 6두품에 만족한다고 했다. 학벌 구조를 골품제에 빗대어 의치대생을 성골로, 서울대생을 진골로 에두른 것이다. "지방 출신에 대한 우리 사회의 공공연한 차별 아니냐"는 분노 섞인 나의 위로에 그는 설핏 웃으며 체념인지 달관인지 모를 '웃픈' 답변을 남겼다.
"지방에서 태어난 건 운명인데 어쩌겠어요. 신라 말 6두품처럼 언젠가는 새 세상의 주역이 될 날이 오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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