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수업이 '재미' 있고 '의미' 있으려면
[추교준 기자]
▲ 학교 3주체(학생, 교사, 부모)가 매년 모여 김장 하는 일, 이것도 학생들이 자신의 삶터를 가꾸는 일이다. |
ⓒ 추교준 |
1.
지혜학교에서의 나의 첫 번째 철학 수업은 '서양고전철학 읽기'였다. (독서 수업은 별도로 이야기할 예정이다.) 지혜학교 수업은 필수수업과 선택수업으로 나뉜다. 말 그대로 필수수업은 해당 학년이면 반드시 들어야 하는 수업이며, 선택수업은 학생들의 관심사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수업이었다. 당시 필수수업은 소장 및 선배 연구원들이 이끌었고, 나는 새내기 연구원으로서 선택수업을 개설해서 진행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첫 수업을 앞두고 나는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는데도 나의 쓸모를 증명하려고 몸부림쳤다. '게다가 여기는 철학을 전면에 내세운 지혜학교가 아닌가? 그렇다면 진짜 철학 수업을 제대로 해야지!' 따위의 헛된 생각에 사로 잡혀 있었다. 다른 이들이 친절하게 풀어 설명한 책이 아니라 맨땅에 헤딩하듯 고전을 직접 읽는 방법을 고집했다. 널리 알려진 철학자의 텍스트,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을 손에 쥐고 학생들 앞에서 열심히 흔들어 댔다. 왜 데카르트가 중요한지, 어떻게 방법서설을 읽어야 하는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학생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방법서설> 6부의 첫 문장을 읽고 나서 학생들과 몇 마디 나누다가 어려움에 빠졌다. 학생들이 역사적 배경 지식을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데카르트가 왜 교황청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지, 갈릴레이가 어떤 재판을 받았는지를 설명하다가 서양 중세 유럽에서의 봉건제와 장원제에 관해서, 또 교황권과 왕권의 관계로 거슬러 올라가서 역사적 배경을 열심히 설명했다.
첫 수업부터 뭔가 꼬였고, 시간이 지나도 꼬인 수업은 풀리지 않았다. 수업이 거듭될수록 엎드려 자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심지어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은 4명이 전부였다!) 학생들은 나와 함께 한 학기 동안 '위대한 데카르트'를 읽긴 했으나, 그래서 데카르트가 어떤 생각을 왜 주장했는지도 모르고, 그렇다고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상황도 뒤죽박죽 헷갈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지금 생각해도 그 학생들에게 미안하다.
2.
이러한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을 했다.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인문통합수업'에 참여하겠다고 손을 들었다. 인문통합수업이란 인문학의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2~3명의 교사들이 협력하여 수업을 구성하고 진행하는 수업이다. '그래, 모든 철학은 사실상 그 시대의 산물이지! 나 혼자 어찌할 것이 아니라 역사, 문학 선생님들과 협력하면 더 좋은 수업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인문통합수업의 틀 안에서 역사적 흐름을 줄기 삼아 당대 문학 작품과 철학 텍스트를 엮어서 수업을 구성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해법을 찾은 나는 몇몇 선생님들과 인문통합수업의 주제를 '사랑'으로 잡았다. '고대 그리스의 사랑(플라톤), 신 안에서의 사랑(아우구스티누스), 아벨라르와 엘로이즈의 사랑이야기, 로미오와 줄리엣,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마지막에는 프롬의 사랑의 기술'까지! 오, 이토록 풍성한 사랑 이야기라니, 아름다웠다. 황홀한 마음으로 동료 교사들과 수업 기획 회의를 하고 역할을 나누었다.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수업의 형태로 다듬어졌다. 엎드려 있다가 일어나는 학생들을 상상했다. 서로 질문하려고 너도 나도 손을 드는 학생들을 떠올렸다. 기분이 매우 좋았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사랑이야기?!' 중3 학생들의 눈이 반짝거렸다. 그렇지 바로 이거야!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3월, 4월 수업이 진행될수록 교사를 보던 학생들이 창밖을 보기 시작했다. 깨어 있던 학생들이 엎드려서 눈을 감기 시작했다. 나를 포함한 교사들은 당황했다. '왜 이러지? 사랑이야기인데 왜 이렇게 시큰둥하지?' 학기 중간에 학생들과 수업에 대한 중간 평가를 했다. 우리 수업에 어떤 좋은 점, 어떤 아쉬운 점이 있는지 터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처음에는 사랑 이야기라고 해서 관심이 갔는데요. 그런데 별로 재미없어요." 이런 피드백을 받아 든 나와 동료 교사들은 이제 '의미'는 과감히 내려놓고 '재미'만을 생각했다. 로미오와 줄리엣 이야기를 다듬어서 이런저런 콩트도 만들었다. 교사들은 교실 여기저기를 뛰어다녔고 학생들은 깔깔 웃었다. 그 학생들이 무엇을 얻어갔는지 알 수는 없다. 지금 생각하면 그 학생들에게도 미안하다.
3.
"…… 그런데 별로 재미없어요" 이 말이 어떤 뜻을 함축하고 있는지는 수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어스름하게 알 것 같았다. 저 짧은 표현을 풀어쓰면 다음과 같다. "플라톤이니, 데카르트니 사랑이니 구원이니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은 알겠는데요, 그게 저한테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이는 단순히 학생들의 관심이나 흥미, 재미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학생들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묻고 있는 것이었다. 이런 철학적 담론들이 이들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이는 낯선 요구였다. 나의 경우, 학부에서부터 대학원까지 철학공부를 계속 이어오고 있었지만, 학문적 훈련을 받느라 정작 중요한 실존적 물음을 놓친 지 오래였다. 나도 관습적으로, 다들 중요하다고 하니까 그런가 보다 하고 무작정 철학자들의 글만 밤낮으로 파고 있었다. 몇 줄 읽은 지식들 안에 어떤 진리라도 스며 있는 것인 양 떠들어댔던 것이다.
그런 나에게 학생들은 철학적 담론들의 현실적 의의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내가 읽고 있는 데카르트니, 칸트니 하는 것들이 내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냐고? 나도 모르는 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줄 수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오히려 자욱했던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았다. 나는 수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고 단지 '철학'을 가르치려고 했던 것이다.
그제야 학생들의 삶을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 재잘거리는 우스갯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무엇에 울고 웃는지 물어보기도 했다. 여기는 120여 명의 학생들이 오며 가며 여러 가지를 배우고 익히는 '학교'이기도 하지만, 함께 모여 앉아 먹고 자는 '집'이자, 뜻을 모아 함께 일을 만들다가 맘이 부딪혀서 싸우고 또 멋쩍은 표정으로 화해하는 '놀이터'이기도 했다. 둘러앉아서 미래의 삶에 대해 불안을 나누기도 하고, 과거의 빛나는 기억들을 꺼내며 추억하기도 하는 '쉼터'이기도 한 것이다.
이들을 보며, 이곳이야 말로 120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자신만의 삶터, 다른 말로 '생활세계'(Lebenswelt)라 부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학생들에게는 각자 자신의 삶터에서 겪고 생각하고 느끼는 온갖 것들이, 자기 안에 품고 있는 온갖 텍스트들이 길게는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켜켜이 쌓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철학 수업이 '재미' 있고 '의미' 있으려면 학생들 각자가 품고 있는 텍스트들이 수업에서 펼쳐져야 한다. 그들이 지니고 있던 텍스트와 철학 텍스트들이 겹쳐져야 한다. '텍스트'와 '텍스트'가 겹치는 곳에서 '콘텍스트'가 드러날 것이다. 이제 내가 무엇을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학생들이 자신의 삶터를 진지하게 돌보고 가꿀 것을 독려하는 것. 그 과정에서 쌓인 경험들을 텍스트 삼아서 주어진 철학 텍스트가 어디에서 어떻게 연결되는지 묻고 말 건넬 것.
나는 수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다음의 결론을 얻었다. 지혜학교에서의 철학공부는 교실 안팎을 넘나 들어야 하며, 어떤 의미에서든지 간에 각자 자신이 돌보고 가꾸는 실존적인 삶을 밑재료 삼아서 철학 텍스트를 다루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개인 브런치에도 게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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