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 아카데미 극장을 배경으로 한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

조영준 2024. 3. 19.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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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8] 큐레이션 03 극장에서 쓰는 편지 <유령극>

[조영준 기자]

 영화 <유령극>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기억은 과거로부터 시작된다. 의식 속에 간직해 온 장면은 조금 낡고 오래되고 빛바랜 상태로 다시 꺼내지고 회상된다. 지금 다시 시작하거나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오늘, 그때와 같은 모습으로 재현 가능한 것을 기억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대신 이어지는 기억은 있다. 외형은 당시의 모습을 잃거나 부분만 남겨졌을지도 모른다. 또한 기능을 상실했을지 모르지만 어떤 시대에 의해, 또 누군가에 의해 지워지거나 사라지지 않은 것들이다. 영원할 수는 없겠으나 기억은 마음을 잃지 않은 이들에 의해 소멸되지 않고 작은 숨을 쉰다.

영화 <유령극>에는 할아버지(서인수 분)와 손자(고예준 분)가 찾는 원주의 오래된 극장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낡아 이미 벗겨지기 시작한 페인트칠과 금이 가기 시작한 외벽, 이제는 사용되지 않을 것만 같은 라디에이터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출입구의 매표소. 신사용과 숙녀용이라고 쓰인 채로 양쪽으로 나뉜 화장실의 모습은 물론 문화극장이라는 당당한 표시문까지. 영화관 곳곳에는 지금까지 살아남고자 했던 시간이 양분으로 삼고 남겨진 흔적들로 가득하다. 이 공간에는 여전히 극장이라고는 이 낡고 허름한 공간밖에 모르는 할아버지와 이제는 다른 영화관에 가보고 싶은 손자 두 사람이 놓인다. 몇 명의 이름 모를 관객도 함께다.

김현정 감독은 원주 아카데미 극장을 모티브로 이 작품을 연출했다. 이제는 철거되어 사라진 공간이다. 극장은 원주시에 의해 일방적으로 파괴되었다. 영화 <유령극>는 사라진 장소의 기억을 잇는 이야기다. 스크린 위로 옮겨진 물성의 공간은 이 작품을 바라보는 이들로 하여금 또 다른 차원의 관객을 만들어낸다. 더 이상 스크린 앞에서 이 극장의 공간을 향유할 수 있는 관객은 없지만 사라진 장면은 그렇게 또 한 번 기억된다.

02.
영화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극장을 가기로 하면서 시작된다. 집에서 보던 비디오테이프에 문제가 생기면서다. 테이프 속에는 오래된 극장의 모습이 담겨 있고, 할아버지는 그 영상을 자주 꺼내봤던 것 같다. 손자는 아니다. 그는 할아버지가 비디오를 보는 내내 이불을 뒤집어쓰고 온몸으로 거부한다. 고장 난 테이프 대신 극장에 가자는 할아버지의 제안에도 싫다는 몸짓을 하지만 별 수 없이 따라나선다. 손자의 마음도 이해는 되는 게, 이 오래된 극장은 다른 영화관처럼 편하지도 않을뿐더러 항상 같은 영화만 상영한다. 상영되는 외화에는 어른과 아이가 등장한다. 두 사람은 서로 숲을 헤매다 우연히 만나게 되고, 어른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장면을 반복해서 떠올리게 된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도 손자에게는 특별한 임무가 주어진다. 스크린 위의 자막을 할아버지에게 하나하나 읽어드려야 하는 것이다. 화면의 전환 속도에 맞춰 발음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막한 상영관 안에서 계속해서 말소리를 내는 건 꽤 고역이다. 관객들 중 일부는 노골적인 눈치를 보내오기도 한다. 사람이라도 많으면 덜 부끄러울 텐데 이 오래된 극장에는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도 별로 없다.

간략한 줄거리를 설명하기는 했지만, 영화 <유령극>은 영화의 중반부에 놓여 있는 두 사람의 대화로부터 다시 재조립될 필요가 있다. 상영된 영상의 처음에 놓여 있던 장면, 어른과 아이가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왜 반복해서 등장하는지 묻는 할아버지의 질문이 시작이다. 이에 대해 손자는 어른이 과거를 떠올리는 장면이라며, 그래야 이야기가 이어지며 슬퍼진다고 대답한다. 이어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본 거냐'고 질문을 하지만 대답을 돌려받지는 못한다.
 
 영화 <유령극>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3.
두 사람의 대화는 단순히 하나의 장면에 대한 이해 유무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의미에 대한 발화다. 이전의 장면에서 우리는 몇 번의 중요한 장치를 지난다. 앞서 언급한 스크린 위의 대사를 할아버지에게로 옮기는 손자의 모습이 그중 하나다. 여기에서는 수용의 시차가 발생한다. 다시 말해, 동일한 영화를 보고 있지만 그를 받아들이는 정도나 깊이는 관객 각자의 상태나 사정에 따라 모두 다를 수 있다는 뜻이다.

또 하나는 장면 사이사이에 삽입되고 있는 필름의 실제 편집 영상이다. 마치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이 장면은 하나의 예술을 창작하고 제공하는 측면의 모습을 그려낸다. 같은 이야기도 어떤 방식으로, 또 어떤 형태로 가공하고 편집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감상을 남길 수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받아들여지는 데는 단순히 수용자의 상태만이 변수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이야기하면, 이 영화가 이러한 장면 너머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극장이라는 공간의 의미다. 다른 새로운 문화에 밀려 쇠퇴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공간이 여전히 창작자와 관객이, 또 관객과 관객이 유무형의 많은 것들을 주고받는 곳이라고 항변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간의 누적과 세월의 경과가 반드시 필요하고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기억이 쌓인 극장의 의미는 그래서 더욱 크다.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그 의미는 쇠퇴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한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04.
영화의 마지막에서 스크린 위의 영상은 재편집된 상태로 다시 한번 상영된다. 처음에 상영되었던 버전과 비슷해 보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이야기 속의 어른과 아이의 목소리 역시 현실 속 할아버지와 손자로 대체된다. 스크린 밖으로부터 넘어 들어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는 이제 단순한 수용자의 자리만이 아닌 함께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존재로까지 발전한 듯 보인다. 겉으로 보기에는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 존재했던 수용의 시차도 사라진 듯 보이고, 편집의 자리에도 직접 뛰어든 것처럼 보이지만 근원적으로 바뀌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두 사람이 여전히 타자인 이상, 두 사람 사이에 간극은 반드시 일어날 것이며 영화는 그 대상으로, 극장은 이를 논의할 자리로 지금 여기에 필요하다. 여전히 공간 속에 머물고 있는 이들도, 그들을 지켜보는 우리 관객도, 누가 이 '유령극'의 무대 위에 서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낡고 오래된 것이라고 해서 모두 없애고 지워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서로의 이야기를 발화하고 쌓아가기 위한 공간으로서의 극장이 갖는 의미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것. 그리고 이 모두는 잊지 않고 기억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은 이 영화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세 번째 큐레이션인 '극장에서 쓰는 편지'는 3월 16일부터 3월 30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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