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준호의 사이언스&] 땅속 천연수소 5조t, 화석연료 시대 막 내릴 주인공 될까

최준호 2024. 3. 19.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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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에너지의 역사가 본격적인 대변환기를 맞고 있는 걸까. 우주에서 가장 풍부한 원소이지만, 인류가 사는 지구 속 자연 상태에선 다른 원소와 결합 없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수소의 상식이 바뀔 조짐이다. ‘천연수소(natural hydrogen)’가 그 주인공이다.

천연수소란 석유나 천연가스처럼 땅속에서 채굴해 얻을 수 있는 순수한 수소분자(H2)를 말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천연수소는 ‘골드(gold) 수소’ 또는 ‘화이트(white) 수소’라 불리기도 한다. 천연수소의 존재는 1920년대부터 조금씩 알려져 왔다. 바닷속 대륙 지각이 부딪히는 해령(海嶺) 부근에서나, 석유 시추과정에서 수소가 발견됐다는 보고가 꾸준히 있었다. 하지만 그간 천연수소는 농도도 낮고, 드물게만 존재할 것으로 여겨져 왔다. 전 세계 과학자들이 수소를 인공적으로 얻을 수 있는 방법을 경쟁적으로 연구해왔지만, 순수한 수소를 값싸게 얻기까진 아직 갈 길이 멀다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었다.

「 대규모 매장 후보지 속속 발견
인류 수백 년 사용할 수 있는 양
국가·기업 차원 관련 연구 활발
아직은 초기, 해결할 과제 산적

수소 발굴 ‘골드러시’의 서막?

서울 여의도 국회 수소충전소에서 운전자들이 충전을 하고 있다. 현재 국내 수소차들은 대부분 천연가스를 개질하거나 제철소의 부산물로 나온 수소를 쓰고 있다. [뉴스1]

하지만 최근 들어 세계 각지에서 석유와 천연가스 발굴 과정 등을 통해 고농도의 수소가 누출되거나 매장돼 있다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지난달 18일 ‘지질학자들이 새로운 에너지 ‘골드러시(gold rush)’의 시작을 알리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그간 무탄소 에너지 자원으로 평가받지 못했던 천연수소에 세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고 보도했다. FT는 미국 지질조사국의 미발표 보고서를 인용해 천연수소 매장량이 전 세계적으로 5조t에 달한다고 전했다. 이렇게 매장된 수소의 대부분은 접근 불가능하지만, 그 일부만 사용하더라도 인류가 수백 년간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보고서의 내용이다. 말 그대로라면, 기후 위기를 부른 화석연료의 시대를 끝낼 수도 있게 된다.

지질학자들이 찾아낸 가장 최근의 대규모 천연수소 매장지는 발칸반도 내 국가 알바니아에 있다. 국제학술지 사이언스는 지난달 알바니아의 불키저 지역의 한 광산에서 역대 최대 규모의 천연수소 샘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이곳은 오래전 바닷속 암반층이었던 곳이 지표로 올라온 ‘오피올라이트’라는 지질층으로, 이곳 땅속 1㎞ 지점 물웅덩이에서는 연간 11t 규모의 천연수소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이 지점을 포함해 일대 광산에서는 연간 200t 이상의 천연수소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외에도 프랑스 로렌 지역에서는 매장량이 수천만 t으로 추정되는 후보지가 발견됐고, 호주 남부 지역 여러 곳에서도 천연가스와 함께 천연수소가 발견되고 있다.

고온·고압 환경에서 생성

다른 원소와 결합한 형태가 아닌 천연수소가 어떻게 땅 밑에 존재할 수 있을까. 사실 천연수소가 생성되는 원리는 과학자들이 물과 고열로 수소를 만들어내는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천연수소가 생성되는 이유는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사문석화(蛇紋石化·serpentinization)’라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지각 아래 맨틀의 철성분을 가진 감람석이 고온 고압의 조건에서 물을 만나면 산화 반응이 일어나 사문석으로 바뀌면서 부산물로 수소가 나온다. 이 외에도 암석 내 방사성 원소가 붕괴하면서 물이 분해돼 수소가 생기기도 한다. 수소는 원소 중 가장 작고 가볍기 때문에 생성되더라도 지상으로 빠져나와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 쉽지만, 암석이나 밀도 높은 퇴적층을 만나면 천연가스처럼 특정 지층 아래 쌓이게 된다.

이처럼 대규모 천연수소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개발에 뛰어드는 국가와 기업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의 첨단연구프로젝트사무국(ARPA-E)은 지난해 천연수소 생산·추출 기술 연구에 2000만 달러(약 270억원)를 지원했다. 미국 스타트업 콜로마는 지난해 빌 게이츠 재단 등으로부터 9100만 달러의 투자를 받기도 했다. 프랑스 석유에너지연구소(IFPEN)는 2010년대부터 천연수소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해 오고 있고, 호주 지질과학원도 2021년 천연수소 연구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천연수소의 연구과 개발은 국내에서도 시도되고 있다. 한국석유공사가 2022년부터 천연수소 발굴을 위한 연구를 시작했다. 박재한 한국석유공사 기술전략팀장은 “2020년 국제학술지에 게재된 천연수소 발견 사례를 집대성한 논문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천연수소 발굴을 위한 과제를 기획하게 됐다”며 “지난해에는 전국 200곳을 골라 천연수소 탐사를 했고, 올해는 6곳으로 대상 지역을 좁혀 천연가스 매장 가능성을 알아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출연 연구소인 한국지질자원연구원도 지난해부터 천연수소 국가 연구개발(R&D) 추진전략안 도출을 목표로 천연수소 시스템 이론 및 해외 사례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는 한편 국내 부존 가능성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다.

인공 청정수소 생산 연구도 계속

이 같은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천연수소의 활용은 아직 미래의 얘기다. 현재로선 메탄(CH4)이 주성분인 천연가스를 촉매로 이용해 고온·고압 환경에서 수소를 뽑아내거나, 제철 과정에서 나오는 수소(부생 수소)에 의지하고 있다. 하지만, 개질(改質·화석연료에서 수소를 뽑아내는 방법) 과정에서 이산화탄소(CO2)가 발생하는 등 환경 문제가 대두할 수밖에 없다. 또 천연가스 국제가격이 급등하면 수소 생산 비용에도 직접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소는 탄소 발생이 불가피하다고 해 ‘그레이(grey) 수소’라고도 부른다. 과학계에서는 최근 천연가스 개질 과정에서 나오는 이산화탄소를 포집하는 방법을 연구 중이다. 이른바 ‘탄소포집·저장(CCS·Carbon Capture and Storage)’ 기술이다. 이렇게 생산된 수소는 좀 더 청정하다고 해서 ‘블루(blue) 수소’라고 칭한다. 가장 깨끗한 수소 생산은 물(H2O)을 전기분해하는 방법이다. 전기와 촉매를 이용해 물 분자를 산소와 수소로 분리해내는 방법으로, 이런 수소는 깨끗한 생산 과정을 거친다고 해 ‘그린(green) 수소’라고 한다.

민병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청정에너지연구본부장은 “천연수소의 존재와 발굴에 관한 연구는 아직 초기 단계”라며 “이미 다가온 수소경제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라도 깨끗한 수소의 생산과 운반·저장 등을 위한 연구는 병행될 수밖에 없는 과제”라고 말했다.

최준호 과학전문기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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