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도변 외딴 휴게소 살려낸 중남미 밴드
[김성호 기자]
일상이 험난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과중한 업무며 어려운 일들이 벌어지고, 때로는 재산을 잃거나 병이 들기도 한다. 심지어는 가까운 사람마저 영영 잃어버릴 때도 있는데 감당하기 어려운 상실감에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느 각도에서 보면 삶이란 온갖 불행과 상실을 맞닥뜨리는 것, 생은 곧 고통이라는 어느 철학자의 말이 그리 틀린 것만은 아닌 것도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살아가야만 한다. 감당키 어려운 고난 앞에서 생에 대한 의지를 붙들고는 눈앞에 펼쳐진 하루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때 그저 잘 될 거란 마음이 큰 힘이 되어줄 수 있다. 그저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기원과 반드시 잘 되리라는 믿음 사이, 그 마음이 인간을 지탱하여 살아가게 하고는 한다.
▲ 엘 꼰도르 빠사 포스터 |
ⓒ 와이드 릴리즈 |
아버지가 남긴 유산, 휴게소 살리기
뿔뿔이 흩어진 가족, 소식이 닿지 않는 형제들을 뒤로 하고 수하(강예원 분)는 아버지의 죽음을 갈무리한다. 오래도록 힘들었던 병환 뒤 아버지가 남긴 것은 휴게소 하나다. 말이 휴게소지 인적 드문 경상남도 시골 국도변에 있는 낡아빠진 건물이다. 수익도 나지 않는 채로 현상이나 유지하고 있는지 오래, 그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수하는 그곳으로 내려간다.
직접 본 휴게소는 상상 이상이다. 조리사라고 하나 있는 박씨(최현숙 분)는 맛없는 요리만 만들 줄 안다. '음식을 좀 신경 쓰라'고 지적하니 '누가 음식을 맛으로 먹느냐'고 답해온다. 그렇다고 그저 놓아둘 수는 없는 상황, 수하는 박씨부터 다잡고 휴게소를 재정비하려 시도한다.
▲ 엘 꼰도르 빠사 스틸컷 |
ⓒ 와이드 릴리즈 |
중남미 음악가와 외딴 휴게소
박씨와 상근을 데리고 망해가는 휴게소를 살려보려는 수하의 시도, 이것이 영화 <엘 꼰도르 빠사>의 이야기다. 물론 이것이 전부라면 제목으로 중남미 국가들의 국민노래라 해도 좋을 '엘 콘도르 파사'를 따올 이유도 없었을 테다. 수하의 휴게소에 일어나는 변화는 오로지 이곳을 찾아온 볼리비아 음악가들로부터 빚어지는 것이다. 중남미에서 온 음악가들과 한국 외딴 휴게소의 어울리지 않는 만남, <엘 꼰도르 빠사>가 그리는 이야기가 바로 이것이다.
한국에서 중남미 음악을 하며 떠돌아다니는 밴드, 가우사이(kawsay) 밴드가 이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에콰도르와 멕시코, 콜롬비아 등 중남미 국가 출신 구성원들로 이뤄진 남미음악 전문 공연단 가우사이 밴드는 그 이름과 구성원 그대로 영화에 출연한다.
▲ 엘 꼰도르 빠사 스틸컷 |
ⓒ 와이드 릴리즈 |
파리만 날리던 휴게소가 붐비기까지
그로부터 영화는 이 휴게소에 일어난 변화를 담는다. 휴게소를 담보로 2억 원이나 대출을 받은 오빠와 그가 수하에게 맡기고 간 딸의 이야기, 그로부터 파생된 이모와 조카의 갈등은 또 다른 사건으로 이어진다. 수하가 낯선 인종들로 이뤄진 가우사이 밴드 구성원들을 탐탁지 않아 하다가 조금씩 그들에게 마음을 여는 과정이며 그들이 이 휴게소에 일으키는 변화도 따스한 시선으로 잡아낸다.
가우사이 멤버들이 맛없는 휴게소 음식 대신 저들의 전통요리를 해 내놓기 시작하고, 그들의 공연이 휴게소를 찾는 이들에게 볼거리로 자리 잡는 과정도 차근히 그려진다. 그런 가운데 파리만 날리던 휴게소가 차츰 지역의 명소로 거듭나게 된다.
▲ 엘 꼰도르 빠사 스틸컷 |
ⓒ 와이드 릴리즈 |
쇠락한 지역, 이주민과의 공존 담아
서울을 제하면 죽어가는 나라는 불행히도 한국의 현실이다. 저 멀리 경상남도 국도변 누구도 찾지 않는 휴게소가 영화처럼 번성하리라 기대할 수 없다는 건 슬픈 일이다. 가우사이와 같은 중남미 전통음악으로 이 같은 변화를 기대할 수도 없을 테다. 조금 구체적으로 들어가 이 휴게소를 찾는 손님들의 객단가며 매출까지 계산해본다면 이곳에서 희망을 찾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 영화는 드라마라기보다는 판타지에 가깝다.
한편으로 영화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게 한다. 외국인 노동자의 노동으로 간신히 유지되는 시설들과 갈수록 줄어드는 내국인의 소비, 그 안에서 말라가는 지역경제를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게 다 잘 되리라는 막연한 기대로 가득한 영화가 도리어 한국의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는 점이 낯설다. 화려하고 세련된 영화들 사이에서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소외된 풍경을 이 영화가 거듭 담아내고 있다는 점도 그렇다.
제목으로 쓰인 중남미 인기곡 '엘 콘도르 파사'는 영화 속 가우사이의 노래로 곳곳에서 들려온다. 이 곡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오로지 이 곡을 듣기 위해서 보는 영화일 수도 있겠다. 여러모로 만듦새에 아쉬운 구석이 있지만 그 기획부터 풀어가는 방식까지 한국 영화계에선 만나기 쉽지 않은 영화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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