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도 '실패한 작전'이라는데 한국은 왜 '전승'기념관일까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윤태옥(답사 여행객)
▲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
ⓒ 윤태옥 |
동해의 깔끔하고 깍듯한 수평선을 큼직하게 잘라내는 듬직한 덩치로 해안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문산호. 이 문산호가 내 시야를 가득 채운 것은 낙동강 전선 답사여행 3일째, 마지막 날의 아침이었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은 충격적이나 날카롭지는 않은 자태, 훤칠하나 뻐기지 않는 품세가 멋지다. 여느 한국전쟁 기념관이나 전시관과는 다르다. 장사동 상륙작전 중에 좌초된 LST667 문산호를 재현해서 지은 것이다. 동해안의 찰박찰박한 바닷물 위에 세운 덕분에 문산호가 방금 접안한 것처럼 보인다. 해안도로에서 진입해 주차를 하고 나무숲을 통과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는 순간의 풍경이다.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가 첫 입장객으로 입장했다. 전시관 초입에서 "청춘의 불꽃 학도병"이란 말이 강렬하고도 묵직하게 내 눈에 들어왔다. 관람 동선을 따라 가며 하나하나 그때의 기록을 읽어갔다. 전시관을 다 돌고는 갑판으로 나와서 심호흡을 했다. 시원한 동해의 맑은 바다와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서 전시관에서의 답답함을 달랬다.
답사여행에서 돌아와 관련자료를 찾아 읽었다. 노트북의 폴더를 열고 닫기를 몇 번씩이나 했으나 오늘에서야 또렷하게 이해가 가는 느낌이라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장사상륙작전은 이렇게 전개됐다.
8일간의 작전, 129명 전사... 안쓰럽고 안타깝다
육군본부는 38선에서 낙동강까지 밀리면서 후퇴하는 국군 병력을 재편해 육본 직할유격대와 독립유격대를 편성했다. 직할유격대는 육본 작전국에서 추진한 유격사령부와 을지병단, 9172부대가 있었고, 정보국의 결사유격대가 있었다. 독립유격대는 정훈감실의 협조로 학도병 일부를 인민군 후방에 침투시킬 목적으로 독립 1유격대대와 2유격대대로 편성했다.
1950년 8월 낙동강까지 후퇴를 거듭하던 미8군 사령관 워커는 포항 북방의 영덕군 장사동(지금의 장사리)에 상륙작전을 펴기로 했다. 그러나 어느 부대를 투입할지 고민했다. 미8213유격중대(Ranger Company)? 국군 3사단? 둘 다 적당치 않아 밀양에서 훈련 중이던 독립 1유격대대를 선정했다. 육군본부는 작전명령 174호(1950년 9월 10일)를 1유격대대장 이명흠(대위)에게 하달했다.
9월 13일 오전 부대를 편성했다. 1유격대대는 4개 중대로 편성된 대대 규모였으나 인민군을 기만하기 위해 대대를 사단으로, 중대를 연대로 각각 위장했다. 위장하기 위해 인민군 계급을 부여했다. 출발시에는 대원들 신분이 아직 학도병이었으나 작전 중간에 정식으로 군번이 부여됐다.
▲ 전시관은 장사동 상륙작전 중에 좌초된 LST667 문산호를 재현해 지었다. |
ⓒ 윤태옥 |
▲ 장사상륙작전을 재현한 모형 |
ⓒ 윤태옥 |
9월 15일 새벽 2시 반 장사동 인근에 도착했다. 그러나 태풍 케지아로 인해 파도가 높고 안개가 짙어 해안에 완전히 접안하지 못한 채 상륙작전을 시도했다. 이때 인민군으로부터 맹렬한 사격을 받았다. 문산호는 새벽 5시 반 선미가 파괴돼 선체가 기울기 시작했고 6시에는 암초에 얹혀 바닥에 구멍이 뚫린 채 횡으로 좌초했다.
1유격대대는 문산호와 백사장의 소나무를 밧줄로 연결하려 했으나 인민군의 사격과 태풍으로 실패하고 미해군 구축함의 함포사격 지원 아래 겨우 밧줄을 연결했다. 대원들은 인민군 토치카로 육박해 전투를 벌였고 9시에는 부대 전원이 상륙을 완료했다. 1유격대대는 오후 3시경 장사동 해안의 주요 거점인 200고지를 점령했다.
9월 16일 1유격대대는 지경리의 125고지 좌측 능선, 대전리의 219고지 우측 능선에 진지를 구축하고 도천리의 봉황산 일대를 방어하며 200고지 중북부에 본부 진지를 구축했다.
9월 18일 5시 이명흠은 지휘소를 200고지에서 문산호로 이동했다. 9시가 되자 인민군이 200고지 동남쪽에서 공격을 시작했다. 1유격대대는 상륙작전 3일이 지나면서 식량과 탄약이 떨어져 갔다. 대대는 200고지를 내려와 해안도로를 따라 포항 방면으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인민군은 2개 연대와 전차 4대를 동원해 공격했다.
1유격대대의 위급상황을 접수한 해군본부는 LT-1 인왕호를 급파했으나 문산호를 구출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JMS-304정 태백산호도 시계불량으로 문산호를 발견하지 못하고 복귀했다. 해군본부는 육군본부에 상륙부대를 구출할 지원부대를 증파하거나 상륙부대를 철수해야 한다고 통보하고 LST 조치원호를 급파했다.
9월 18일 1유격대대가 포항 방향으로 남진하던 중 미군 헬기가 나타나 이명흠을 미해군 함정 헬레나함으로 데려갔다. 이명흠은 함장에게 식량과 탄약 지원과 함께 지원사격을 요청했다. 오후 3시 비행기가 장사동 일대에 전단을 살포해 LST 2척이 급파될 것이니 해안지역을 확보하고 대기하라고 알렸고, 헬레나함은 헬기를 이용해 비상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했다.
9월 19일 6시 반 이명흠은 현장으로 복귀해, 포항 방면으로 이동 중이던 부대에게 다시 북상해 문산호로 집결하도록 지시했다. 인민군은 북상하는 대원들을 공격했으나 함포사격과 공중폭격의 도움으로 막아냈다. 부대는 19시 장사동 해안에 집결했다. 110명의 부상자를 포함해 상륙 부대원과 문산호 선원 등 725명을 구출하고 다음 날 9월 20일 20시 부산항으로 복귀했다. 장사동 해안에는 유격대원 32명이 남아 있었다. 일부는 북한군의 포로가 됐고 일부는 탈출해 복귀했다.
▲ 책 <6.25전쟁 시 상륙작전>에 실린 문산호 구출작전 요도 |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
이렇게 해서 9월 13일부터 8일간 실시된 장사상륙작전은 종료됐다. 국방부가 1983년에 펴낸 <인천상륙작전>에 따르면 129명이 전사했다.
실전경험은커녕 기본훈련을 겨우 받았을 뿐인 학도병이자 신병들로 상륙작전을 감행한 유엔군과 국군이, 그런 작전을 기안하고 명령을 하달한 육군본부가 안쓰럽고 안타깝기 그지없다. 학도병이란 단어가, 17세의 우국충청이란 칭송이, '아저씨 저는 열일곱 살이라며 버티다가 전장에 끌려갔다'는 회고가 안쓰럽고 안타깝기만 하다.
수도 서울을 빼앗긴 것은 물론 낙동강 전선까지 내몰려 이제 곧 부산 앞바다에 침몰할 것 같은 상황에 무슨 일인들 못했을까. 미국은 이미 유엔군이 한반도에서 철수하면서 대한민국 정부는 제주도로 옮길 계획까지 검토하던 판국이었으니.
그러나 전면전이 멈추고 70여 년이나 흘렀다. 그들의 용기를 칭송하고 죽음을 위로하면서 역사로 되새겨보는 일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눈을 지그시 감고 그들의 죽음과 고난에 위로의 말씀을 올린다.
장사상륙작전에 대한 재검토
전승기념관을 다 돌아보고, 돌아와서 한국전쟁 공간사를 일별하고도 뭔가 찜찜하고 어색한 느낌이 남아 있었다. 하나는,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기 위한 양동작전 또는 기만작전이라는 것이다.
명칭 자체가 전승기념관인데 승리했다는 것인지 최선을 다했다는 뜻인지, 사실의 서술인지 추모의 수사인지 선뜻 판단이 서질 않았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이라는 대반격의 한 갈래였다면 일반인들에게 알려진 것이 너무 없다는 것도 이상했다.
이런 미진한 느낌은 최근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책임연구원인 박종상의 최근 논문을 보면서 말끔하게 풀렸다. 그는 동북아역사논총 69호(동북아역사재단, 2023.9)에 '6.25전쟁 시 장사상륙작전에 대한 재검토'라는 논문을 실었다. 그의 논문을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는 장사리의 지역사 기록과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의 전시물은 물론 자신이 속한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펴낸 <6.25전쟁사>(2009) 등 기존의 연구와 저술들을, 한국전쟁 직후에 발간된 자료와 정부기록물, 미국 국립문서보관소(NARA)의 문서들과 교차해 검토했다. 결론적으로 크고 작은 많은 오류들을 수정했다.
▲ 기념관에 전시된 장사상륙작전 전개 과정 |
ⓒ 윤태옥 |
작전에 대한 평가에 가장 먼저 관심이 쏠렸다. 그의 논지는 명료해 충분히 공감했다. 1유격대대는 육본 작전명령 174호(D일 H시 P장소에 상륙을 감행시켜 동대산을 거점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해 1군단 작전을 유리하게 하라)에 명시된 동대산까지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 상태에서 철수했다. 장사동 일대의 교량을 폭파하고 포항-영천 국도를 일시 차단했고, 인민군 일부 부대를 장사동으로 이동하게 만들었지만, 이것으로 국군 1군단의 작전을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했다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북한의 공간사인 <조선전사>는 "인민군 련(연)합부대는 적들의 배후 기습작전을 완전히 파탄시키고 놈들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이 전투에서 괴뢰군의 대부분은 소멸되고 나머지 일부가 미제 침략군 해군함선들의 함포사격의 엄호 밑에 겨우 빠져 나갔다"고 기록하고 있다.
미해군 군사연구실의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KOREA>는 실패한 작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미국 NARA 문서도 전술적으로 완벽하게 실패한 작전이라는 당시의 평가를 전해주고 있다.
장사상륙작전이 종료된 후 미국 극동해군사령관에게 보내는 문서(1950년 11월 10일)에서는 장사상륙작전이 미8군 사령관이 단독으로 지시한 작전으로 이후에는 소규모의 상륙작전일지라도 해군의 지휘를 받도록 건의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상륙부대원들의 분투는 고귀하고 안타깝지만 전승이라는 기념관의 명칭 자체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당시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 이외에 새로운 안타까움이 덧붙은 것이다.
장사상륙작전은 기만작전이 아니었다
군사작전의 모든 사항은 작전명령으로 지시된다. 그런데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맥아더의 크로마이트 작전 100-A, 100-B, 100-C, 100-D 네 개의 계획 어디에도 장사동 상륙은 없었다. 참고로 100-A는 군산 상륙이고, 100-B는 인천 상륙이다. 100-C는 인천 상륙 이후 여의치 않으면 1개 사단을 군산으로 상륙시키는 계획이다. 100-D는 인천 상륙과 함께 국군 1~2개 사단을 강릉과 주문진에 상륙시키는 계획이다.
▲ 인천상륙작전과 기만작전 |
ⓒ 박종현 |
또 하나는 아군이 장사동을 공격한다고 해도 평양의 전쟁 지휘부가 이곳에서 적군이 대규모 상륙작전을 도모한다고 속겠느냐는 것이다. 장사동 자체가 대규모로 상륙할 여건이 아니고 상륙해도 기동공간이나 교통로 등이 낙동강 전선이나 수도 서울 등과 같은 주전장에 영향을 미치기 어려운 지역이다.
장사상륙작전은 포항의 국군 3사단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는 인민군의 후방에 침투해 그 압력을 감소시키자는 것이었다. 낙동강 방어선이 긴박해 병력을 빼낼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학도병을 활용하고 작전 중에 서둘러 군번을 부여하고 전개한 작전이었다.
이것 이외에도 중요한 사항들도 바로 잡아주고 있다. 장사상륙작전은 9월 14일로 알려져 왔지만 그것은 이명흠의 회고록의 오류이고, 당시 미해군의 서로 다른 함정들의 일지에 전부 15일로 정확하게 기록돼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군사용어에 대한 검토도 흥미롭다. <6·25전쟁사 제6권>(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9년)의 해군작전에는 기만작전 양동작전 상륙기습작전이란 용어로 장사상륙작전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들은 군사용어의 오류라는 것이다. 장사상륙작전은 공격작전이지 기만작전이 아니고 양동(陽動)작전도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합동참모본부의 교범에 양동작전은 '적을 기만할 목적으로 아군이 결정적인 작전을 기도하고 있지 않은 지역에서 실시하는 무력시위로서, 양공(陽功)작전과 비슷하나 적과 접촉하지 않는 것이 다르다'고 규정돼 있다. 장사상륙작전은 적을 직접 공격한 작전이기 때문에 양동작전이 아니라 양공작전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기만작전이 아니기 때문에 양공작전이라고 하는 것도 적확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상륙기습작전의 정확한 뜻은 해상이나 육상의 발진기지로부터 적의 해안에 상륙하여 목표지역을 신속하게 습격하거나 일시적으로 점령했다가 해상 또는 지상으로 계획된 대로 철수하는 작전이다. 그러나 장사상륙작전은 계획된 철수가 아닌 아군의 위급상황으로 인한 철수였기 때문에 기습작전이란 말도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이런 용어상의 혼란과 오류는 역사기록으로서는 크고 작은 착오를 일으키게 하고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잘못된 역사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자칫 추도나 회고의 수사가 실제 역사를 과장해 왜곡하거나 객관적인 역사기록에 주관적인 감성적 서술을 섞어버리는 일이 될 수 있다. 당장 전승기념관이라는 명칭이 오류 아닌가.
▲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전시 내용 |
ⓒ 윤태옥 |
이와 함께 다른 문제도 재검토돼 있다. 772부대란 명칭이 상륙작전에 참가한 1유격대대의 대원 숫자인 772명에서 왔다는 것도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하고 있다. 772부대는 장사상륙작전 이후인 1950년 11월 24일 창설된 육군본부의 정훈1대대다. 1유격대대 부대원은 772명이 아닌 764명이고, 772부대와 함께 창설된 773부대가 773명이 아닌 것처럼 772부대도 772명과는 무관한 일반적인 명칭이라는 것이다.
상륙작전의 준비과정에 대해서는 일부에서 장사상륙작전을 육군의 단독 상륙작전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미8군 사령관 워커가 지시하고 국군이 상륙작전을 수행한 연합작전이라고 하는 게 정확하다. 그 외 장사동에서 조치원호가 구조한 인원은 110명의 부상자와 문산호 선원을 포함해 총 725명이며, 해안에 잔류한 인원은 39명이 아니라 32명이라는 것도 수정했다.
이처럼 국내의 연구와 기록들이 오류 또는 차이를 보이는 이유는 1차 자료가 부족해 대부분 증언이나 회고를 근거로 했고, 군사용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연구자의 성향이 반영돼 연구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논문을 읽고 다시 생각해 본다. 가장 앞서는 소감은 앞에서도 말했듯 안타깝고 안타깝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념관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진열돼 있다는 것은 생각해 볼 만한 문제다.
그 근거는 기본적으로 공간사와 지역의 기록이다. 한국전쟁을 읽어오면서 나는 국방부의 공간사에 대해 일정한 불신을 깔고 있었다. 특히 형용사와 부사가 과도하게 편향적이고 감정적인 묘사라고 느껴지는 부분은 배제하며 읽었다. 이 논문을 읽고 나서는 숫자와 명사와 군사용어에 대해서도 신뢰도를 더 낮추게 됐다.
반면에 장사상륙작전에 대해 세밀하게 연구하고, 굳이 수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항목까지 검토한 것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연구원이라는 사실에 안도하기도 한다. 과거의 크고 작은 오류를 성의를 다해 수정하고 보완하는 것은 역사기록을 다루는 사람들의 막중한 책무란 점에서 반전의 기대를 갖게 됐다는 것이다.
▲ 장사상륙작전 전승기념관 외부 |
ⓒ 윤태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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