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와서 암이 생겼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제주 이민 10년차들을 만나다]

박순우 2024. 3. 16.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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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이민 10년차들을 만나다] 누구보다 진한 제주의 삶을 사는 이라연씨

'제주 이주 열풍'이 분 지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지난 10년 동안 제주를 떠난 사람도 있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사람도 많다. 그들의 진짜 삶이 궁금해 직접 인터뷰에 나섰다. <기자말>

[박순우 기자]

의사들의 파업이 이어질수록 병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떠오른다. 혹여 불편 부당한 일을 겪고 있지는 않을까. 수도권에서 나고 자란 나는 제주도로 이주한 뒤에야 우리나라가 얼마나 서울공화국인지를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모든 주요 인프라가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는 건 물론이고, 태풍마저도 서울을 지나가야 크게 보도하는 게 바로 한국이었던 것.

이런 상황에서 제주 10년차 이주민 인터뷰를 준비하다 한 사람이 떠올랐다. 대다수 이주민이 숙소나 카페를 차릴 때, 토종 씨앗으로 농사를 짓고 해녀복을 입고 물질에 나선 이라연(45)씨다. 농사와 물질을 병행하며 누구보다 진한 제주의 삶을 살던 라연씨는 2년 8개월 전 폐암 4기 진단을 받았다. 진단 이후에는 농사를 그만 두고 남편과 민박집을 관리하며 살아가고 있다.

큰 변화 속에 있으면서도 누구보다 단단하게 삶을 이어가고, 자신의 병을 숨기지 않고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모습을 보면서, 라연씨의 삶이 더 궁금해졌다. 라연씨는 제주에서 어떤 시간들을 보냈을까. 찬바람이 부는 겨울날 아침, 향긋한 동백꽃차를 나눠 마시며 라연씨와 마주앉았다.

타인의 도움
 
 이라연씨와 남편 이윤구(53)씨가 바닷가에서 환하게 웃고 있다.
ⓒ 이라연
 
- 제주 이주 붐이 불기도 전에 제주에 오셨어요. 정확하게 언제 오셨고, 왜 오셨나요?

"2011년 1월에 왔으니 14년째 살고 있네요. 원래 전라남도 장흥으로 가려다가 마침 제주로 내려가는 친구가 있어서 이쪽으로 왔어요. 제주에서는 농사랑 물질을 함께 할 수 있다고 해서 홀리듯 급 선회해서 오게 됐어요."

- 제주에 오셔서 농사를 지으셨어요. 원래 농사를 짓던 분이었나요?

"대학 졸업하고 광고회사에서 잠깐 카피라이터로 일하다가 번아웃이 빨리 와서 그만두고, 환경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했어요. 그때 환경과 생태에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그런데 그 일에서도 벗어나고 싶더라고요. 서울에서 친구들이랑 수색 항공대 앞에 500평 밭을 빌려서 공동경작을 해본 경험이 있어요.

그때 자전거 메신저 일을 했는데 키운 작물을 배달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다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자전거와 함께 후진하는 트럭 아래 깔렸는데 다행히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병원에서 퇴원한 뒤에 도시가 서먹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원래 삼십 대 중반쯤 귀농하고 싶었는데 계획을 앞당겼죠."

- 자영업이나 회사일과는 다르게 농사일은 바로 수익이 생기지 않잖아요. 수익이 생기기까지 긴 시간이 걸리는데 불안하지 않으셨나요?

"농사일을 선택한 것부터가 큰 돈을 벌 생각이 없었어요. 초반에는 품일을 해서 갭 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때는 돈을 정말 안 쓰며 살았어요. 의류수거함에서 옷을 꺼내 입기도 하고, 재활용센터에 버려진 그릇을 갖다 쓰기도 했어요. 차도 없어서 히치하이킹을 해서 이동하기도 했고요. 젊음과 의지 하나로 친구들이랑 똘똘 뭉쳐서 막걸리에 기대어 살았던 것 같아요.

'환경을 위해 에너지를 덜 쓰자'는 생각도 있었고 돈이 실제로 없어서 그러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결국은 다른 사람들 도움에 많이 기대어 산 것 같아요. 타인의 선의가 없으면 지속 가능하지 않은 삶이었으니까요."

- 아무리 기술이 발달했다지만, 농사 만큼은 여전히 하늘의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농사를 지으면서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땅을 빌려서 농사를 지었는데 수도가 걸려 있지 않은 밭들을 빌리게 돼서 물이 너무 귀했어요. 제주는 습하지만 가물 때도 많은데, 제때 비가 와주지 않거나 수확을 앞두고 비가 마냥 내리면 너무 속상했어요. 노루가 다 뜯어먹는 밭을 빌리기도 했었죠. 제가 있는 동쪽은 뿌리작물 농사가 많아서 다행히 태풍 피해를 크게 본 적은 없어요."

스스로 자립
 
 수확한 농산물 박스에 정성스런 손글씨 편지를 담은 모습.
ⓒ 이라연
 
- 농사 지으시면서 제주 토종 씨앗을 고집하셨어요. 일상에서도 제주어를 자주 사용하시는데, 누구보다 제주를 사랑하고 아낀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토종 씨앗은 매년 새로 씨앗을 사지 않고 씨를 받아서 농사 지을 수 있는 게 좋았어요. 특히 종류가 다양한 토종 콩 종류들을 보면 모양도 이름도 귀엽고 예뻐서 마음이 갔어요. 토종 씨앗으로 화학비료나 농약을 쓰지 않고 좀 작고 벌레 먹더라도 유기농으로 농사 짓고 싶었어요. 제주에 온 첫 해 품일 했던 밭도 한살림 생산자의 밭이었어요.

처음에는 유기농 퇴비도 사용하지 않았는데 수확량이 정말 형편 없었어요. 몇 해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했는데 쉬운 일이 아니더라고요. 나중에 당근 농사 지을 때는 저도 유기농 퇴비를 섞어 쓰고 그랬어요.

제주어는 옆집 삼춘(제주에서 이웃 어른을 뜻하는 말)들, 제주가 고향인 여성농민회 언니들이랑 자주 만나면서 저도 모르게 많이 늘었어요. 제주어가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분이 많은데, 1~2년만 제주 삼춘 조끄테(곁에) 살면 금방 배울 수 있어요. 모든 사투리가 그렇지만 제주어는 특히 말이 간결하고 평어가 많아서 좋아요."

- 7년의 기다림 끝에 2018년 처음 물질에도 도전하셨어요. 쉬운 도전은 아니었을 것 같아요.

"제주에 온 첫 해에 친구들이랑 해녀학교에 다녔어요. 바로 물질을 하고 싶었지만, 그러려면 마을회에 가입을 하고 어촌계 소속이어야 해서 쉽지가 않았어요. 짝꿍이랑 살림을 합치고 나서 바로 가입이 됐어요. 시켜만 주면 바당(바다) 안에서 훨훨 날아다닐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제 체력이 따라주지 않더라고요.

깊은 물에만 들어가면 멀미를 해서 먹은 걸 위아래로 다 게워냈어요. 그래서 빈 속으로 들어가면 체력이 달려서 힘들고, 먹고 들어가면 게워내는 악순환이었어요. 물질 끝나고 나서 체력 보충한다고 밥도 고기도 많이 먹었는데 살이 빠지더라고요. 돌이켜 보면 그때 이미 몸에 부하가 걸린 게 아닌가 싶어요.

물질하는 방법도 잘 몰랐어요. 해녀학교는 물에 들어가는 두려움을 없애는 교육을 주로 하고, 구체적인 물질 방법을 가르쳐주진 않거든요. 다른 삼춘들 따라다니면서 배워야 했어요. 몇몇 삼춘들은 친절하게 가르쳐주지만, 어떤 분들은 귀찮아 하셨어요.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에 나오는 장면처럼요."

- 임신을 하면서 물질을 그만 두신 걸로 알고 있는데, 아쉽지는 않으셨나요?

"아쉬웠어요. 이제 막 시작했는데, 한 2~3년 더 바다에 익숙해진 뒤에 아기가 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마음이었죠. 한편으로는 아기가 와서 일을 줄일 수 있어 좋다는 마음도 있었어요.

민박에 밭농사에 귤농사, 물질까지 제주에서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해내고 있던 때 딱 임신이 됐거든요. 그땐 그게 피곤한 줄 몰랐는데 아마도 그때 제 체력을 다 끌어쓴 게 아닐까 생각해요. 몸을 더 아껴 썼어야 했는데, 뭘 그리 열심히만 살았나 싶어요."
 
세상의 도움

- 아이를 낳고 2년 뒤에 건강검진을 하다 폐암 4기 진단을 받으셨어요. 지금은 몸을 위해 농사 일은 내려놓고 민박 일만 하고 계세요. 진단 당시 어떤 마음이셨는지 궁금합니다.

"그 해 봄에 감기도 아닌데 이상하게 기침이 오래 갔어요. 아기가 아직 통잠을 자지 않아서 밤중 수유를 하던 중이라 체력이 달려서 그런가 싶었어요. 짝꿍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면서 건강검진할 때 폐CT를 추가로 찍어보라 하더라고요. 그때 이상 소견이 나와서 바로 서울 큰 병원으로 가서 다시 CT 찍고 조직검사를 하고, 알크변이 폐암 4기 진단을 받았어요.

진단을 받고 많이 울었어요. 지금은 그래도 아이가 좀 컸지만, 그땐 태어난 지 2년 밖에 되지 않았을 때라 너무 어렸거든요. 그게 너무 슬펐어요. 제가 21살 때 엄마가 돌아가셨어요. 저도 엄마를 빨리 여읜 편인데, 저희 아이는 너무 빨리 엄마가 곁에 없게 될까 봐 그게 제일 두려웠어요. 매해 꿈을 갱신하고 있어요. 아이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만, 졸업할 때까지만, 스무 살 때까지만, 아이가 짝꿍을 만날 때까지만. 현실은 올해 병설유치원 입학이지만요."

- 서울 병원에서 진단 받고 1년 뒤 수술도 받으시고, 지금도 정기적으로 진료와 검사를 받고 계세요. 오가는 게 시간과 비용, 체력 면에서 소모가 클 것 같아요. 제주에서 치료를 받긴 어려웠나요?

"제주가 고향인 여성농민회 언니들과 이웃들이 모두 입을 모아 당장 서울 큰 병원으로 가라고 했어요. 그간 제주 큰 병원에서 부모님들이 아프실 때 치료를 받으면서 생긴 아쉬움이나 후회의 경험들이 쌓여 있었어요. 검사와 외래 때문에 일 년에도 여러 번 탄소발자국을 쿵쿵 찍으면서 서울 병원을 다니는 것에 대해 생각이 많지만, 병원을 바꾸는 것도 쉽지는 않아요. 특히 4기 암환자는 다른 병원에서 잘 받아주지 않아요. 원한다고 병원을 바꿀 수도 없어요."

- 의대 정원 확대 문제로 정부와 의사 집단 간의 갈등이 극심한 현재 상황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 같아요. 직접적으로 불편을 겪진 않으셨나요?

"제가 다니는 신촌 세브란스는 작년부터 문제들이 점점 커지고 있었어요. 영상의학과 판독의들이 집단 퇴사한 뒤에 충원이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았거든요. 원래 CT를 찍고 나면 4~5일 안에 영상판독이 이뤄지는데, 지금은 한 달이 넘어야 판독이 돼요. 한 달 전 검사 결과로 외래를 보는 이상하고 불안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거죠.

각 지방의 국립대병원들의 의료 수준이 서울 병원 만큼 올라가면 좋겠어요. 자기 지역에서 높은 품질의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면 모두가 서울로 향하지 않겠죠. 서울행에 수반되는 피로감과 비용을 줄일 수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아요. 의대 정원 확대만으로 풀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고, 공공의료의 폭과 질을 높이는 방향으로 실마리를 풀어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 제주 시골에서의 삶이 진단을 늦춰 병을 키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진 않으셨나요?

"그렇게 생각해 보지는 않았는데, 그럴 수도 있겠네요. 제가 아쉽게 생각하는 점은 더 일찍 발견할 수 있었는데 늦어진 점이에요. 암 진단을 받기 2년 전에 지역으로 찾아오는 국가건강검진을 동네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큰 트레일러에서 받았어요.

그때 흉부 엑스레이를 찍고 나서 의사가 제게 결핵을 앓은 적이 있냐고 물었어요. 없다고 했더니 슬라이드 한 구석을 가리키면서 여기 하얗게 보이는 게 결핵을 앓은 흔적이라고, 간혹 앓았는지 모르고 지나가기도 한다더라고요. 그때 만일 의사가 정밀검사를 받아보라고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제주에 와서 암이 생겼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다만 제 몸을 잘 돌보지 못한 시간들은 후회가 돼요. 제가 빨리 잘 하는 스타일이 아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꾸준함과 성실함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제가 좋아하는 가치이기도 했고요. 열심히 살면 무난하게 살아지겠지 했는데, 그 와중에 나를 돌보는 일에 소홀했더라고요. 일에서만 자꾸 즐거움과 만족감을 찾으려 했어요."
 
 이라연씨의 가족이 비자림 걷기 운동을 한 뒤 잠시 쉬어가고 있다.
ⓒ 이라연
 
- 암 진단을 받은 뒤 2년 반이라는 시간이 흘렀어요. 그 사이 딸아이도 많이 자랐고, 원래 살던 구옥을 떠나 새집을 지어 이사도 하셨어요. 얼마 전에는 여행도 다녀오셨고요. 삶에 지지 않는 모습 같아 보였어요. 암 진단을 받기 전과 후의 삶은 어떻게 다른가요?

"딱 2년 8개월이네요. 이렇게 한 달 한 달 세며 살게 될 줄 몰랐는데 진단 이후 그렇게 변했어요. 진단 받은 게 까마득한 거 같은데 아직 3년도 안 됐구나 싶기도 하고, 벌써 2년하고 8개월이 흘렀구나 싶기도 해요. 울먹울먹하며 보낸 시간은 생각보다 짧았고 빨리 받아들였어요. 그럼에도 살아야 하니까요. 하루하루가 소중해졌어요.

암 진단을 통해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배운 것 같아요. 암세포도 내가 만들어 낸 거잖아요. 암이 온 건 아쉽지만, 아쉽기만 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로써 내가 변해서 내 삶이 더 좋아지는 것도 많아요. 예전에는 제가 요리나 살림을 더 많이 했는데, 지금은 남편이 많이 하고. 둘의 관계도 훨씬 좋아졌어요."

- 다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서 제주로 이주하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제주행을 택하시겠나요?

"제주에 온 걸 후회하지는 않지만, 시계를 거꾸로 돌리면 제주에서 살진 않을 것 같아요.(웃음) 제주에 살아본 사람으로서 판단하게 되니까 제주는 이만하면 된 것 같아요. 대신 강원도나 지리산 자락에 기대어 살아보고 싶어요. 바다 대신 365일 갈 수 있는 작은 수영장과 도서관이 있는 산동네에 살며, 종종 여행하면서 살고 싶어요. 저도 제주도는 놀러 오고 싶어요.(웃음)"
 
 이라연씨는 얼마 전 가족과 함께 태국여행을 다녀왔다.
ⓒ 이라연
 
라연씨는 환경을 위해 직접 만든 천기저귀를 빨아 쓰고, 농사를 지을 때도 유기농법을 고집했다. 그랬던 그가 병과 함께 살아간 뒤부터는 어쩔 수 없이 탄소발자국을 찍으며 비행기를 타고 서울에 간다.

의료 불균형이 환경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는데, 이럴 땐 세상 모든 일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게 무척 실감난다. 세상의 도움 없이 개인의 힘만으로 소신을 지키며 살아가는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인터뷰가 끝나자마자 라연씨의 전화벨이 울렸다. 남편과의 짧은 통화를 마친 라연씨는 어디에 있는지 뻔히 알면서 세 통이나 걸었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서로에 대한 사랑이 묻어나는 대화를 엿들으면서, 어쩌면 라연씨는 지금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한때를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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