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들어야 할 쪽은 MBC가 아니다
[김종성 기자]
▲ 황상무 대통령실 시민사회수석 |
ⓒ 연합뉴스 |
황 수석이 언급한 1988년 사건은 그해 8월 6일 <중앙일보> 자매지인 <중앙경제신문>의 오홍근 사회부장이 육군 정보부대 군인들에게 테러를 당한 일을 가리킨다. '권력은 잘 들어'라고 하지 않고 'MBC는 잘 들어'라고 했으니, 황 수석의 언급은 '오홍근처럼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는 의미로 이해되기 쉽다.
황상무 수석은 발언 이틀 뒤인 16일 출입 기자들에게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했다"라며 "떠올리고 싶지 않았을 사건의 피해자 유가족 여러분께도 심심한 사과와 위로의 말씀을 올린다"라는 사과 메시지를 남긴 것으로 보도됐다. 하지만 이런 사과로 덮이기에는 14일 발언이 너무 강렬했다는 점을 부정하기 힘들다.
[관련기사 : '회칼 테러 언급' 황상무 "심려 끼쳐 사과" https://omn.kr/27u7p]
'청산해야 할 군사문화'의 배경
1988년 초중반은 6월항쟁 이듬해라서 민주화 열기가 아직 뜨거울 때였다. 이때의 화두 중 하나는 사법혁신이었다. 독재 권력의 시녀로 부역해온 사법부를 일신하자면 그 일환으로 대법원장부터 제대로 뽑아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그런데 김용철 대법원장의 임기가 아직 절반도 지나지 않은 상태였다. 전두환 대통령에 의해 임명된 그의 임기는 1986년 4월 16일에 개시됐다. 1980년에 나온 당시 헌법 제106조 제1항은 "대법원장의 임기는 5년"이라고 규정했다.
1988년 2월에 출범한 노태우 정권은 김용철 대법원장을 재임명하는 쪽으로 방침을 굳혔다. 그해 6월 4일자 <동아일보> 1면 좌중단에 따르면 여당인 민주정의당(민정당)의 고위 관계자는 "김 대법원장의 경우 재야 일각에서 거부감을 보이고 있으나 다른 대안이 없는 데다 아직 임기 중이기 때문에"라며 김용철 카드를 밀고 나가겠다는 입장을 언론에 밝혔다.
이런 태도는 야당이나 법조계뿐 아니라 소장 법관들의 반발까지 초래했다. 사법파동이라 불릴 만한 대규모 저항이 이로 인해 시작됐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김용철 대법원장은 6월 17일에 사퇴 기자회견을 열었다.
그러자 노 정권은 서울형사지방법원장 출신인 정기승 당시 대법관을 승진시키려 했다. 그러나 이것도 돌파구가 되지 못했다. 현 대법관을 올리려는 이 시도 역시 반발에 직면했다. 대법원을 일신해야 할 상황에서 기존 대법관을 승진시키는 것도 문제지만 하필이면 형사지법원장 출신을 내세우는 것도 문제라는 시각이 강했다.
그해 7월 1일자 <경향신문> 10면 우상단에 따르면, 대한변호사협회는 6월 30일자 성명에서 대법원에 포진한 서울형사지방법원 출신들이 정권의 지시 하에 시국사건을 취급하던 전두환 집권기의 행태를 지적하면서 정기승 임명에 대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그렇지만, 노태우 정권은 개의치 않았다. 정기승 임명을 그냥 강행했다. 7월 1일 국회에 임명동의를 요청했고, 다음날 국회에서 표결이 이뤄졌다.
이는 헌정 사상 최초의 사건이 국회에서 일어나는 원인이 됐다. 대통령이 요청한 대법원장 임명동의안이 국회에서 부결되는 초유의 사태였다. 투표 참석 의원 295명의 과반수인 148표에 7표 모자라는 141표가 나와 임명동의는 무산됐다.
'가'나 '부'만을 표기하도록 돼 있는 투표 용지에 일부러 '찬', '정기승', '정기승 가' 등을 적어넣은 무효표가 14표나 나왔다. 찬성표인 듯하지만 실상은 무효인 이 표들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
7월 3일자 <한겨레> 톱기사는 무효표의 주요 진원지로 집권당을 지목했다. 전 국민적인 사법개혁의 목소리가 민정당 의원들까지 동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사법연수원생들까지 서명운동에 나섰다는 그달 2일자 <한겨레> 기사는 그런 분위기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보여준다. 이 열기가 민정당에도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결국 노태우 정권은 박정희 집권기에 대법원판사(대법관)을 지내며 인민혁명당재건위 사건 같은 시국 사건에서 피의자의 기본권을 옹호하며 소수의견을 냈던 이일규 전 대법관을 대법원장에 임명하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 오홍근 국정홍보처장 기자회견_프레스센터 오홍근 국정홍보처장 프레스센터에서 외신기자회견 1999.10.4 [본사 자료사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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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 대법원장 인선 과정에서 입법-사법-행정 등 3부를 강타한 태풍은 한마디로 군사문화가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데서 빚어진 비극이다. 문제의 핵심은 역시 6공화국의 집권층이 국민과 사법부와 입법부를 보는 시각이 잘못돼 있다는 데 있다. 그 같은 시각은 바로 군사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데 문제가 있다. 군사문화의 시각에서 보면 이번 사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직 임관도 안 된 사법연수원생들이 임관 여부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정부를 상대로 어떻게 반란을 일으킬 수 있으며 그저 시키는 대로 형량을 선고하고 주문하는 대로 구속영장에 도장이나 꾹꾹 눌러주면 될 일이지, 사법부를 독립해서 무얼 어떻게 하자는 이야기인가. 사법부는 군사문화 사령관의 법무참모쯤 된다는 분수를 망각한 것 아닌가."
이 칼럼은 사법부를 억압해온 군사문화를 비판하면서 이를 '청산 중인 과거 문화'로 자리매김시켰다.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같은 표현에서 그런 분위기가 묻어난다. 위 인용문의 뒷부분에는 "민심이 그쪽이 아니라고 알고 있으면서 강행하려 한 점이 '청산되지 않은 군사문화'란 지적을 받는 것"이라는 대목도 있다. 청산이란 표현은 이 외에도 더 있다.
정치 군부는 6월항쟁 이전까지 26년간 대한민국을 억눌렀다. 이들은 윤석열 정권하의 정치 검사들처럼 자신들이 대한민국의 엘리트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6월항쟁은 심대한 타격이었다. 이로 인해 두려움도 갖게 되고 자존심의 상처도 입게 됐다. 그런 정치 군인들을 상대로 오홍근 기자는 '군사문화 청산'을 계속 언급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심한 자극이 될 만한 일이었다.
어이없는 테러... 새겨들어야 할 사람은
칼럼을 읽은 육군 정보사 군인들은 테러에 착수했다. 이것은 지휘 체계를 갖춘 테러였다. 1991년 4월 14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오홍근 테러 정보사 군인들 대부분 명예회복'이란 기사에 "범죄의 실행에 직접 가담한 육군 정보사 예하부대장 이규홍 준장(ROTC 1기) 등"이라는 표현이 실린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사건은 육군 고위층의 관여하에 젊은 군인들이 행동대원이 되어 저지른 사건이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9.17)을 한 달여 앞둔 8월 6일 오전 7시 반쯤이었다. 9일자 <조선일보> 15면 우하단에 따르면, 오홍근은 회사에 가기 위해 강남구 청담동 삼익아파트 5동 101호를 나왔다. 200미터쯤 걸어갔을 때였다. 남자 셋이 이름을 부르며 접근했다. "우리는 대공에서 나왔는데 함께 가야겠다"라는 말이 그들의 입에서 나왔다.
남자들은 오홍근을 차에 태우려 했다. 오홍근이 저항하자 이들은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 그런 뒤 칼을 꺼내 오홍근의 왼쪽 허벅지를 그었다. 길이 20cm, 깊이 3cm의 상처가 생겼다. 그런 뒤 그들은 사라졌다. 육군 정보사 군인들이 출근 시간대에 서울 강남에서 어이없는 테러를 저질렀던 것이다.
문제의 칼럼 이전에도 오홍근은 군사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에 대한 사전 경고로 보이는 일들이 그 전에 있었다. 8월 8일자 <경향신문> 14면 하단은 그해 4월 초에 오홍근의 집 주소를 묻는 전화가 신문사로 걸려왔고, 4월 말에는 "몸조심하라"는 협박 전화가 오홍근에게 두 차례 걸려왔었다고 보도했다. '오홍근 잘 들어'라는 사전 경고가 두 차례 있은 상태에서 8월 6일의 테러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홍근에 대한 테러는 군사정권 전성기에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6월항쟁으로 군부의 기가 한풀 꺾인 상태에서 발생한 사건이다. 옳다 그르다를 떠나, 시점상으로 볼 때도 어이없는 테러였다. 대중을 겁주는 효과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군사정권을 더욱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36년 전에 대한민국을 시끄럽게 했던 이 사건을 떠올리면서 누군가에게 '너 잘 들어'라는 말을 해줘야 한다면, 그 누군가는 시대착오적인 행동을 저지른 쪽이어야 한다. 오홍근 기자나 그의 정신을 계승하는 사람들은 그런 말을 들을 이유가 없다. 황상무 수석의 "MBC 잘 들어"는 그 '누군가'를 잘못 찍은 발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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