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팡이 짚고 오픈런…노인우울증 덮친 이곳, 정신과 딱 1곳뿐

이아미, 이영근 2024. 3. 1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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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7일 경기 연천군에 하나뿐인 A 정신건강의학과 의원. 우울증 등으로 내원한 노인 환자들이 대기실에 앉아 진료를 기다리고 있다. 오전 대기가 마감되었다는 간호사의 말에 발걸음을 돌리는 환자들이 속출했다. 이아미 기자


“어머님, 오전 접수는 마감됐어요”
우산을 지팡이 삼아 이른 아침부터 A 의원을 찾은 유모(81)씨는 간호사의 말을 듣고 한숨을 쉬었다. 연천군에 하나 뿐인 정신건강의학과 A 의원이 오전 9시에 진료를 개시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선착순이라 어쩔 수 없다”는 설명에 발걸음을 돌리는 유씨 뒤로 ‘입구 컷’을 당하는 노인들이 속출했다. 20여 명이 들어찬 대기실도 80%가 머리칼이 하얗게 센 노인들이었다. 지난달 27일 방문한 A 의원에서 매일 오전 반복되는 풍경이다.

연천군은 지난해 기준 경기도에서 노인 인구 비율(30.98%)이 가장 높은 곳이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A 의원이 개원하기 전까지 이 지역 노인들이 진료받을 수 있는 민간 정신과 의료기관은 한 곳도 없었다. 10년째 우울증을 앓는 김모(73)씨는 “이전에는 편도 세 시간씩 걸리는 동두천의 병원까지 통원하느라 하루가 다 간 적도 있는데, 병원이 생겨 한결 좋다”고 말했다.

김주원 기자

연천군 보건의료원 정신과에서 7년간 근무한 엄세준 A의원 원장은 “농촌이라고 정신질환이 덜할 것이란 고정관념이 있는데, 농사짓는 분들이 알코올 중독으로 우울증 등 정신 질환까지 연결되는 경우가 많다”며 “의료원을 그만둔 뒤 서울에 개원할지 고민했는데, 주치의가 갑자기 사라지면 환자들의 치료 공백이 생길 것 같아 연천에 개원했다”고 말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따르면 65세 이상 우울증 환자 수는 2018년 24만8712명에서 2022년 26만6493명으로 매년 늘고 있다. 전체 우울증 환자의 35.69%(2021년 기준)도 60대 이상이다. 노인 인구 1000만 시대를 앞둔 만큼 고령층 주요 질환으로 자리 잡은 우울증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정근영 디자이너

그나마 연천군은 사정이 나은 편이다. 심평원에 따르면, 올해 1월 기준 전국 시군구 261곳 중 29곳에는 정신과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민간 의료기관이 전무했다. 강원도 철원군, 전라북도 무주군, 경상북도 영덕군 등 대부분 농어촌이었다. 반면 서울 강남구에는 정신과 의료기관이 114개에 달했다.

노장우 굿네이버스 방화2종합사회복지관장은 “고령층은 우울증 등 정신질환 자체를 인식하지 못해 제때 적합한 치료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이 복지관에서 관리를 받는 김모(88·여)씨도 그런 사례다. 이혼 직후 찾아온 우울을 그저 ‘화병(火病)’으로 여기고 방치했다. 처음 우울증 진단을 받은 것도 20년 전 조카가 반강제로 정신과에 데려간 덕분이었다. 김씨는 “(조카가) 정신과는 미쳐서 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언짢으면 가는 거라면서 예약해놨더라”고 했다.

지난 1월 서울 강서구 자택에서 만난 김모(88·여)씨. 50여년 전 이혼 직후 우울증이 발병한 김씨는 "화병으로만 생각하고 오랫동안 정신과를 가지 않았다"고 했다. 이아미 기자


전문상담센터 확충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충남 논산시에 사는 장모(77)씨도 3년 전 코로나19로 남편과 사별한 뒤 우울증 진단을 받았지만, 최근 증세가 많이 호전됐다. 논산시에서 2014년부터 운영하는 ‘어르신행복상담센터’를 꾸준히 다니고 나서다. 센터에는 전문 상담사뿐 아니라 동년배 상담사가 가정을 방문해 말벗 상담을 하는 프로그램도 있다. 동년배 상담사로 활동하는 정미령(68)씨는 “일주일에 한 번 1시간씩 가정방문 해서 어르신들 말벗 봉사를 하는데, 어르신들은 우리 오는 날만 기다리신다”면서 “자식보다 낫다고 하는 분들도 있다”고 했다.

김동욱 대한정신건강의학과의사회 회장은 “지방에 환자가 적은 곳은 개인이 개원하기 힘든 구조이기 때문에 지자체가 정신건강증진센터 등 공공 보건기관을 확충해야 한다”며 “지역 민간 의료 병원과 공공의료가 협약을 맺어 진료를 보거나, 지자체가 교통 편의를 제공해 접근성을 높이는 방안도 검토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아미·이영근 기자 lee.ahm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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