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삼식의 ‘리어’ vs 고선웅의 ‘욘’… 인간의 부질없는 욕망 그리다

장지영 2024. 3. 16.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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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창극단 ‘리어’, 2022년 초연 매진… 최고 창작진 집결
서울시극단 ‘욘’, 고선웅의 첫 입센 도전… ‘쉬운 연극’ 지향


배삼식(54)과 고선웅(56). 현재 한국 공연계를 대표하는 두 극작가가 각색한 고전이 나란히 무대에 오른다. 오는 27일 개막하는 국립창극단의 ‘리어’와 서울시극단의 ‘욘’이다. 4월 7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오르는 창극 ‘리어’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을 원작으로 했고, 4월 21일까지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에서 공연되는 연극 ‘욘’은 헨리크 입센의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을 무대화했다. 공교롭게도 두 작품 모두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그 부질없음을 보여준다.

배삼식과 고선웅은 완성도 높은 희곡을 내놓는 작가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스타일은 뚜렷하게 비교된다. 배삼식이 관조적이고 서정적이라면 고선웅은 대중적이고 감각적이다. 전업 극작가인 배삼식은 희곡 자체가 높은 문학성을 가지며 ‘읽는 희곡’으로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연출을 병행하는 고선웅의 경우 희곡을 무대화했을 때 몰입감이 좋은 데다 수정에도 유연한 편이다.

각색으로 범위를 좁히면 두 작가의 특징은 더욱 두드러진다. 둘 다 재창작 수준의 각색을 보여주는데, 원작을 꿰뚫은 뒤 자신만의 해석과 통찰력을 더하기 때문이다. 다만 배삼식이 이야기의 큰 틀을 유지하면서 한국적 말맛과 깊은 사유를 담아낸다면, 고선웅은 종종 원작의 틀을 깨고 아예 새로운 이야기를 덧붙여 재미를 더하기도 한다.

노자 사상으로 푼 ‘리어’… 물 20t 사용
국립창극단 ‘리어’ 초연의 한 장면. 김준수가 연기하는 리어왕이 사랑하는 막내딸 코딜리어를 잃고 망연자실한 모습이다. 물을 사용한 무대에 리어왕의 그림자가 비친다. 국립극장 제공

‘리어’는 국립창극단에서 2022년 초연 당시 전석 매진을 기록한 화제작이다. 당시 작창가 한승석, 연출가 정영두, 무대디자이너 이태섭 등 국내 공연계 최고 창작진이 모이기도 했지만, 개막 전부터 배삼식이 ‘리어왕’을 물(水)의 철학으로 일컬어지는 노자 사상과 엮어낸다는 점에 관심이 쏠렸다. 그동안 국내외 학계에서 노자로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분석한 시도가 있었지만, 무대에서 둘을 연결한 사례는 국립창극단의 ‘리어’가 처음이었다.

원작을 읽으며 ‘천지불인(天地不仁, 세상은 어질지 않다)’이라는 노자의 말을 떠올린 배 작가는 극 중 수많은 인물의 욕망과 갈등을 물의 흐름 속에서 펼쳐냈다. 대본에 맞춰 이태섭이 디자인한 무대에도 자연스럽게 물이 등장한다. 20t의 물을 사용해 수면의 높낮이와 흐름의 변화로 작품의 심상과 인물 내면을 표현한 것이다. 배우들이 물을 헤치며 걷거나 뛰고, 넘어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은 시간이라는 물살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인간의 욕망과 어리석음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올해 재연은 초연과 마찬가지로 김준수, 유태평양, 민은경 등 국립창극단 배우 15명이 출연해 한층 농익은 소리와 깊어진 연기를 보여준다.

27년 만의 ‘욘’ 공연… 막장 드라마같은 재미
서울시극단의 연극 ‘욘’의 주역 배우들. 왼쪽부터 아들 엘하르트 역의 이승우, 엘라 역의 정아미, 보르크만 역의 이남희, 귀닐 역의 이주영. 세종문화회관 제공

서울시극단의 ‘욘’은 고선웅이 처음으로 연출하는 입센의 작품이다. 근대극의 선구자 입센은 25편의 희곡을 남겼고, ‘인형의 집’ ‘헤다 가블러’ ‘민중의 적’ 등은 국내에서도 꾸준히 선보여졌다. 하지만 말년의 수작인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1997년 무대에 오른 게 국내에선 유일했다. 당시 제목도 ‘잃어버린 시간 속의 연인들’으로 바뀌었는데, 주인공의 이름인 제목이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욘 가브리엘 보르크만’은 젊은 시절 권력과 부를 누렸으나 횡령으로 8년간 수감생활에 이어 8년간 칩거해온 남자 욘과 그를 둘러싼 가족 구성원들의 충돌을 그렸다. 욘 역의 이남희를 비롯해 정아미, 이주영, 이승우 등이 출연한다. 고선웅은 최근 ‘욘’ 연습실 공개에서 “처음엔 입센이라는 이름이 주는 권위에 짓눌렸다. 하지만 연습을 시작하고 배우들의 의견을 들어가며 수정하다 보니 작품이 변증법적으로 진화했다”고 설명했다.

고선웅은 2시간 넘는 원작을 속도감 있게 압축하는 한편 인간의 욕망과 고독이라는 주제를 쉽게 풀어냈다. 그래서 100여년 전 작품임에도 마치 요즘 막장 드라마를 보는 듯한 재미를 준다. 이런 변화는 “연극은 쉬워야 한다”는 고선웅의 철학을 반영한다. 고선웅은 “어려운 연극은 대다수 관객에게 쾌락이 아닌 고통을 준다고 생각한다”면서 “주제는 쉽게 느껴지지만 미학이나 배우들의 표현은 볼만한 연극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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