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연의 K컬처] 한국인의 높은 기대수명, 비결은 ‘든든한’ 건강보험 덕분
금방 지나가는 몸살감기인 줄 알았다. 주말부터 미열이 계속되던 딸아이에게 해열제를 먹이며 곧 괜찮아지려니 생각했다. 월요일에도 몸이 썩 좋지 않았던 딸아이는 결국 등교를 하지 못했고, 오후부터 심한 배앓이를 시작했다. 그제야 딸아이를 안고 병원으로 차를 몰았다. 집 근처에 딸아이의 주치의가 있지만 예약 없이 그를 만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미국에서 예약 없이 의사를 만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 우선 근처 큰 병원에 딸린 ‘어전트 케어’(urgent care). 거기엔 일반과목 전문의가 상주하고 있어 간단한 진단이나 처치가 가능하다. 그다음은 응급실.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러운 사고나 통증을 일으킨 환자들이 찾는 최후의 보루다. 이날 딸아이는 이 두 곳 모두를 전전하며 인생 처음 생고생을 경험하게 된다.
어전트 케어의 한 진료실. 한 인도 의사가 웃으며 들어온다. 딸아이를 침대에 눕히고 배 이곳저곳을 눌러본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배 한 곳을 세게 누르자 딸아이가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진다. 의사의 진단은 맹장(딸아이의 맹장은 이때 이 돌팔이가 터뜨린 게 분명하다). 즉시 응급실로 옮겨야 한다며 구급차를 불러주랴 묻는다. 구급차 사용 기본료는 약 500달러. 지금 전화해도 도착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꽤 걸릴 것이다. 급한 마음에 딸아이를 둘러업고 병원을 나선다. 다행히 근처에 주(州)에서 유명한 어린이 전문 종합병원이 있어 그리로 내달리고, 15분도 되지 않아 응급실에 도착한다. 접수 후 아이는 수액을 맞으며 진단에 필요한 각종 검사를 받는다. 초음파 결과가 애매해 밤늦게까지 기다리다 결국 베테랑 베트남 의사의 용단에 따라 수술이 결정된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마취주사를 맞고 열을 세던 딸아이의 눈이 서서히 감기는 모습을 보며 눈물을 훔친다. 수술이 진행되던 4시간 여 동안 ‘의료비 몇 푼 아끼려다 아이만 고생시키는구나’하며 자책과 후회가 계속된다. 다행히 딸아이는 곧 회복하여 3일 후 병원을 나올 수 있었다.
병원에서 의료비 청구서가 날아온다. 수술과 입원을 포함 총 2만달러가 조금 넘는다. 당시 환율로도 약 2400만원 정도 되는 금액이니 누구에게도 적은 금액일 수 없다. 그러나 당황할 필요는 없다. 내가 최종 납부해야 할 금액은 정확히 1250달러. 한화로 150만원 정도다. 미국에서는 주로 사원을 대신해 고용주가 민영 의료보험에 가입한다. 필자가 재직하던 대학에서는 나와 가족을 위해 매월 2000달러가 넘는 의료보험을 들어주었으며, 의료비 규모에 관계없이 당해 가입자의 주머니(out-of-pocket)에서 직접 지불해야 하는 최대 금액은 인당 1250달러, 가족당 2500달러로 정해져 있다. 그 해 사고와 발병이 계속되든, 지병으로 오랜 기간 병원신세를 져야 하든, 의료비 때문에 가세가 기울어질 일은 없다. 그대에게 든든한 직장이나 그만큼의 보험료를 감당할 수 있는 돈이 있다면.
한국에서 홀로 중년의 삶을 시작한 지 4년 차가 되던 지난해. 공교롭게도 나는 딸아이와 같은 증상으로 같은 수술을 받아야 했다. 이렇게 큰 고통을 이틀씩이나 참으며 침대에 앉아 조용히 책을 읽던, ‘아빠, 괜찮아요’ 하며 억지스레 웃다가 결국 응급실에 실려가야 했던 딸아이의 얼굴이 연신 떠올랐다. 한 인간에게 이렇게 큰 미안함을 느낀 것이 그때가 사십 평생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의료비 총액은 약 400여 만원. 병원에서는 정부(건강보험공단)에 약 280만원을, 그리고 나머지 120만원 정도를 나에게 청구했다. 추가로 들었던 두 개의 민영보험을 적용하고 나니 내가 내야 할 돈은 2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미국과 비교해 볼 때, 의료비도 낮지만 보험료도 심히 저렴하다. 한국 의사의 지식수준과 숙련도까지 고려해 보면 ‘K-의료’라는 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몇 해 전 미국에 남게 된 아내와 아이들을 위한 보험을 알아본 적이 있다. 건강한 3인 가족의 경우 가장 저렴한 플랜도 월 300달러가 훌쩍 넘어간다. 이런 종류의 보험은 만에 하나 발생할 수 있는 중증 장애나 사고 시에 가입자를 구제하기 위한 제도 정도라고 하면 독자는 이해할 수 있을까. 감기나 가벼운 처치로 병원을 방문하는 경우 의료비 대부분을 본인이 직접 부담해야 한다. 가족 전체가 타고난 건강 체질이라 병원 신세 질 일이 거의 없거나 웬만한 통증이나 사고는 이 악물고 버틸 자신이 있거나 둘 중 하나는 할 수 있어야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다.
미국에서는 월 프리미엄이 최소 1500달러 이상되는 보험은 들어야 그나마 여유롭게 병원을 드나들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원하는 의사를 제때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치의를 통해 전문의를 만나 제대로 된 치료를 받기까지 최소 2-3주는 걸린다. 인기 있는 전문의를 만나려면 몇 달을 기다려할 때도 있다. 예방을 위해 연 1-2회 주치의를 만나지만 특별한 증상이 있지 않는 한 정밀검사는 없다. 한국에서와 같은 종합검진은 건강염려증이 심한 소수의 부자들에게만 허용된다. 미국의 의료체계를 버텨내고 있는 이들에게 한국의 의료 현실은 이상, 아니 환상에 가깝지 않을까.
물론 현실에서의 환상은 그 이면에 부자연스러운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한다. ‘환상적인’ 한국 의료체계 뒤에는 정부와 부자가 있다. 건강보험료 납입 금액이 개인의 소득 수준에 따라 누진 적용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발상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부자든 빈자든, 납입액에 관계없이 정확히 같은 혜택을 누린다는 것이다. 더 나은 혜택을 원한다면 개인보험을 따로 들어야 한다. 건강보험료로 이미 지출이 많은 부자들에게는 여간 억울한 일이 아닐 게다. 의료수가 역시 시장이 아닌 정부(건강보험 정책심의 위원회)에서 정한다. 치료에 소요되는 의료인의 인건비, 시설 운영비, 재료비 모두를 정찰제로 공시해 의료비를 안정시키고 국민의 건강을 차가운 시장으로부터 보호한다. 의료전문 변호사를 고용해 병원 측과 건건이 의료수가를 흥정해야 하는 미국의 보험사들이 의아해할 일임은 분명하다.
공공성을 이유로 의료시장에 깊게 개입하고 있는 정부, 그리고 ‘한국인의 높은 평균 기대수명이 다 내 덕이지’하며 으스댈 부자들 모두 마뜩지 않다. 자유와 선택, 개인의 존엄성, 시장경제의 가치를 귀히 여기는 필자에게 둘 모두 이상과 거리가 먼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 이상(理想)에 가까운 미국의 의료체계는 차갑고 쓸쓸하기만 하다. 오히려 그것과 정면으로 배치된 한국의 의료현실이 더 따뜻하고 포근하게 다가온다. 아이들이 아직 이중 국적자라 한국에 가끔 올 때면 건강보험의 혜택을 받을 수 있다. 훌륭한 의사를 적시에, 또 이렇게 저렴한 비용에 만날 수 있음에 대한 감사함은 물론 한국에서 일하는 아빠로서 뿌듯함 마저 느낀다. 이상적인 의료체계에 대한 고민이나, 지속가능성, 양심, 딜레마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틈은 거기에 없다.
김상연 광운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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