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원 목사의 고백록] 나는 채집 인간으로 산다

2024. 3. 16.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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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사람의 뇌는 짧고 단순한 말에 쉽게 설득된다고 하는 것일까.

"길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간판, 거리의 이름, 행인, 지붕, 간이매점, 혹은 술집이 말을 걸어오기 마련이다. 마치 숲의 마른 잔가지들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놀란 백로의 외침처럼." 이뿐인가.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지금은 최첨단 디지털사회가 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채집 인간으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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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DB


# 오래전 강의차 목포에 가 있을 때다. 미처 생각해 본 일이 없던 황혼 이혼이 핫뉴스가 돼 있었다. 마침 차량이 쓱 지나치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간판이 있었다. ‘헤어 지지마.’ 헤어샵 간판이었다. 깊은 생각에 잠겼다. 첫 사람이자 최초의 부부였던 아담과 하와가 수많은 잘못에도 한 가지 잘한 일이 있었다. “그들은 끝까지…‘헤어지지’ 않았다.”

# 일본에서 ‘자살 명소’로 유명한 곳에 입간판 하나를 내걸었더니 자살률이 절반으로 뚝 떨어졌다. 뭐라고 썼을까.

“잠깐만 기다려! 하드 디스크는 지우고 왔니?”

이래서 사람의 뇌는 짧고 단순한 말에 쉽게 설득된다고 하는 것일까. 진리의 언어는 작고 단순하고 부드럽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하는 거지, 다리가 떨릴 때 하는 게 아니거든.” “어떤 사람은 25세에 이미 죽어버렸는데 장례식은 75세에 치른다니까.”

사람들은 이런 말들에 가슴을 연다. 언어의 기술을 수사학(修辭學)이라 부른다. 수사학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인문학 중의 인문학이다. ‘호모 로쿠엔스’(Homo Loquens·언어의 인간)로 사는 내가 가진 대표 취미가 있다면 ‘간판 묵상’이다. 낯선 동네를 가면 가장 먼저 하는 것도 간판을 살피는 일이다.

간판이 그 동네나 마을, 도시의 얼굴이어서다. 독일 베를린 출신 언어철학자 발터 벤야민은 ‘길을 헤매는’ 산책의 기술을 이렇게 말한다. “길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간판, 거리의 이름, 행인, 지붕, 간이매점, 혹은 술집이 말을 걸어오기 마련이다. 마치 숲의 마른 잔가지들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나 먼 곳에서 들려오는 놀란 백로의 외침처럼.” 이뿐인가. 간판 묵상은 따분할 때나 기분이 울적할 때도 제격이다. 뇌에 산소를 공급해 준다. 생각의 지평이 열린다.

‘은밀한 고수의 솜씨-닌자 초밥’ ‘외로움은 팔지 않아요-남자의 부엌’ ‘집밥 그대로 가정 식당-동태 한 마리’ ‘대부도가 친구다-바지락 칼국수 한 그릇’ ‘어머니 부엌에선 손님도 아들’ ‘행복한 12시, 점심은 이곳’ ‘오늘 점심은 화끈한 낙지볶음’ ‘경주 이씨 엄마가 만들던 김치찌개’ ‘별리 3~4번지 황영감네 한우 등심’….

간판에 새겨진 인문학이다. 주인이 자리를 비웠어도 기웃거리게 하는 마력이 있다. 발길을 끄는 것은 쇼윈도우만이 아니다. 간판에 주인의 삶의 철학, 언어 감성, 미학이 새겨진다. 나아가 간판의 유머도 있다. 어떤 것은 코믹하고 어떤 것은 빙긋이 웃게 만든다.

3·1운동 관련 사진을 세계 언론에 뿌려 3·1 운동 민족대표 ‘34인’으로 불린 이가 있다. 스코필드(한국명:석호필) 의사다. 그는 반세기 활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기 전 한국에 살려면 네 가지가 필요하다고 했다. 하나님 유머 인내 포켓머니였다. 유머는 간판에 담기기 시작했다.

‘빵구똥구 문구야’(아동 문구점) ‘똥 싼 바지 세탁하던 날(세탁소)’ ‘강변마을 다람쥐(도토리 묵집)’ ‘뽀글뽀글(미장원)’ ‘그물에 걸린 바다(횟집)’…. 간판 채집 취미를 가진 나에게 간판을 걸어야 한다며 ‘꽂히는’ 간판 비밀 좀 알려달라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나누고픈 비밀은 이거다.

‘Secret(시크릿)’이란 간판을 본 엄마가 딸에게 묻는다. “저게 무슨 뜻이니.” 딸이 엄마 귀에다 대고 속삭인다. “그건 ‘비밀’이야.” 그러자 엄마가 하는 말. “나한테만 이야기해 주면 안 되겠니.”

싱겁다고?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간을 좀 쳐 주랴? “전도자는 지혜로운 사람이기에, 백성에게 자기가 아는 지식을 가르쳤다. 그는 많은 잠언을 찾아내서 연구하고 정리하였다. 전도자는 기쁨을 주는 말을 찾으려고 힘썼으며, 참되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말을 찾으면 그것을 바르게 적어 놓았다. 지혜로운 사람의 말은 찌르는 채찍 같고 수집된 잠언은 잘 박힌 못과 같다. 이 모든 것은 모두 한 목자가 준 것이다.”(전 12:9~11, 새번역)

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지금은 최첨단 디지털사회가 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채집 인간으로 살고 있다. 내게 과거는 ‘오래된 미래’다.

송길원 하이패밀리 대표·동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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