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에게 국가는 운명 아니라 선택이었다…'조미아' 이야기 [김기협의 남양사(南洋史) <3>]

김기협 2024. 3. 16.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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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협 역사학자

몇 해 전부터 ‘근대’의 의미에 생각을 모으면서 ‘국가’가 초점으로 떠올랐다. 국가는 문명 발생 이래 인간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아 온 제도다. 그런데 근대 들어 다른 모든 제도를 압도하는 절대적 존재가 되었다. 오늘의 우리는 국가를 중심에 두고 세상을 바라보는 근대인의 습관에 빠져 있다.

21세기에 접어든 지금은 국가의 퇴조가 분명하다. 백 년 전 1차 세계대전 때 사람들의 의식을 철통같이 지배하던 국가의 힘이 이제 많이 약해졌다. 지금 사람들은 실제적인 일들 앞에서 국가를 꼭 앞세우지는 않게 되었다. 어린 아들이 숨겨 놓은 동지를 적군에게 들키게 했다고 손수 처형하는 아버지는(내 어릴 때 어느 교과서에 나왔던) 사이코패스로 여겨지는 세상이 되었다.

‘국가 이후’를 생각할 시점에서 ‘국가 이전’을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국가주의 시대의 우리는 국가를 주역으로 하는 역사에만 관심을 쏟았다. 근대 이전의 역사관에도 국가주의 경향이 있었지만 근대세계에서 그 경향이 더 극심해졌다.

기원전 3세기 중국의 방대하고 치밀한 국가조직을 보여주는 병마용(兵馬踊) 유적. 제1갱에서만 6천여 개 인형이 출토되었다.
세계산업노동자동맹(IWW)의 선전 포스터 “자본주의 피라미드”(1911).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가의 폭력성을 자본주의체제의 본질로 이해했다.


국가주의를 벗어날 생각을 하며 동남아로 눈길이 간다. 유라시아의 인구 밀집 지역 중에 국가의 역할이 비교적 작았던 지역이다. ‘국가’의 의미를 되새겨보기에 적합한 배경이다.


‘발전’의 길을 외면한 사회들


제임스 스콧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 The Art of NOT Being Governed〉(2009)이 시야를 열어주었다. 스콧이 고찰하는 조미아(Zomia)는 동남아 대륙부의 안쪽 산악지대, 그리고 비슷한 자연조건이 이어지는 중국 서남부와 인도 동북부를 포함하는 지역이다. 이 지역 주민들이 국가 지배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던 모습을 스콧은 보여준다.

이곳을 단순히 ‘미개’ 지역으로 보던 통념에 스콧은 이의를 제기한다. ‘미개’라면 발전하지 ‘못한’ 상태란 말인데, 못하기보다 ‘않은’ 측면을 보자는 것이다. 집약농업의 생산력, 국가조직의 효용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싫어서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고, 그런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어 발전의 길을 외면한 사회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19세기 후반의 사회진화론은 인종주의 등 파생된 문제들 때문에 비판을 받았으나 그 핵심 명제들은 아직도 힘을 지키고 있다. 사회의 발전단계에 대한 믿음이 그렇다. 모든 변화의 흐름에 ‘불가역적 법칙성’이 있다는 생각을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19세기 말 동남아에서 샴(태국) 외에는 모두 유럽인의 식민지였다.

발전론자들은 결과를 중시한다. 집약농업과 국가조직을 채택한 사회들과 그러지 않은(또는 못한) 사회들이 나란히 있다면 후자의 사회들은 우승열패의 법칙으로 도태되어 전체적 발전 방향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스콧은 다르게 본다. 그는 문명을 완성된 ‘결과’가 아닌 끝없이 진행 중인 ‘과정’으로 본다. 과정이기 때문에 구성원들의 축적된 경험이 문명의 진로를 결정하는 경로의존성이 작동한다. 그렇게 본다면 국가의 역할이 작았던 남양인의 경험이 닥쳐오는 탈-국가, 탈-근대 단계에서 중요한 참고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농업세계에서만 절대적이었던 ‘국가’


체계적 역사서술의 배경에 국가가 있었다. 국가가 보장하는 환경 속에 역사학이 존재하는 만큼 탐구와 서술의 중심을 국가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민족국가가 역사학의 교육과 연구를 위해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준 덕분에 세워진 근대역사학은 ‘민족(국가)의 역사’로 출발했다.
헤로도토스(왼쪽, 기원전 484-425경)는 풍성함으로, 투키디데스(오른쪽, 기원전 460-400경)는 냉철함으로 평판이 높다. 이 차이가 국가와의 관계에서 온 것 같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제국에 속한 소아시아에서 태어난 후 타향에서 살아간 반면 투키디데스는 아테네 시민으로 태어나 장군 등 공직을 맡았다. 헤로도토스를 엄정한 학자가 아닌 ‘이야기꾼’으로 깔보는 시각이 많았다고 하는데 작업 방식 역시 국가와의 관계에 좌우된 결과일 것이다. 확고한 스폰서가 없는 헤로도토스는 대중이 좋아할 만한 소재와 서술방식을 택해야 했을 것이다.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86경) 이전의 중국 역사서술은 국가사업이었다. 사마천도 태사령의 관직에서 〈사기(史記)〉를 편찬했지만, 새로운 스타일로 민간 역사서술의 길을 열었다.

신석기시대의 농업혁명은 인류의 생활방식을 크게 바꾼 계기였다. 농업혁명을 통해 국가조직과 문자 사용의 확산이 함께 진행되었으니 국가가 그 이후 역사의 주역을 맡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역사의 드라마에서 주연의 역할이 전부가 아니다. 산업혁명이 불러일으킨 전면적 변화 속에서 주변부의 복선(伏線)에도 큰 의미가 있다는 사실이 떠오르며 정치사에 몰두하던 역사학이 사회사, 문화사, 생활사 등 새로운 영역으로 관심을 넓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국가를 역사의 주체로 보는 통념은 끈질기게 남아있다.

데이비드 스니스는 〈머리 없는 국가 The Headless State: Aristocratic Orders, Kinship Society, and Misrepresentations of Nomadic Inner Asia〉(2007)에 유목세계의 국가 역할을 작게 보는 관점을 내놓았다. 정치조직의 본체는 분권화된 귀족층에 있고 국가 차원의 거대조직은 상황에 따라 편의적으로 덧씌워지는 껍데기일 뿐이었다는 관점이다.

유목민이 천막(yurt, ger)을 세우는 모습


이완 원주민의 원두막집. 손쉬운 재료로 며칠이면 “내 집 마련”이 가능한 곳에서는 국가조직을 뒷받침할 정주(定住)사회의 형성이 어려웠다.

농업세계 사람들은 유목세계에서도 국가가 중심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농업국가와 마주친 유목민들이 국가체제를 모방하기도 했다. 통일된 진한(秦漢)제국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흉노제국을 토머스 바필드는 〈위태로운 변경 The perilous frontier: Nomadic empires and China〉(1989)에서 “그림자 제국”이라 불렀다. 농업제국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한 장치일 뿐, 국가체제의 내부조직이 구축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D. Sneath, The Headless State: Aristocratic Orders, Kinship Society, and Misrepresentations of Nomadic Inner Asia (2007)
T, Barfield, The perilous frontier: Nomadic empires and China (1989)

유목민은 농업세력과 접촉을 통해 국가체제의 강점을 인식하고 모방하기도 했으나 그 모방에는 한계가 있었다. 자연환경의 차이와 그에 따른 생산양식과 생활양식의 차이 때문이었다. 유목민의 국가 경험은 농업세계와 본질적으로 달랐고 남양인도 마찬가지였다.


국가는 운명 아닌 하나의 옵션


농업혁명은 “농업의 지배”가 아니라 “농업의 발생”을 뜻하는 것이다. 온대지역의 큰 강 유역에서 출발한 농업문명이 주변의 건조지대, 산악지대, 해양지대로 퍼져나가는 과정은 그 후 오랜 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과정에서 특히 주목받아 온 현상이 건조지대의 유목활동이다. 유목민은 특화된 생산물을 농업사회에 제공하면서 곡식, 직물 등 필수품을 공급받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밀고 당기기’를 오랫동안 계속했다. 역사기록에는 그 관계가 파탄을 일으키는 장면이 두드러지게 나타나지만, 평온하게 진행되는 상황이 더 많았다.

스콧이 보여주는 조미아 주민들은 농업사회와 그런 상호보완적 관계를 맺을 여지가 없었다. 농업사회의 경작지 확장에 일방적 압박을 받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쉽게 굴복하지 않고 오래 버틴 것은 집약적 정착농업을 확대하기 힘든 자연조건 덕분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정착을 강요하는 국가의 통제를 벗어나 화전을 일구러 달아날 곳이 얼마든지 있었다.

강 유역의 벼농사 지대에 국가들이 만들어지지만, 대다수 주민은 국가와 비-국가 영역 사이에서 오락가락했다. 국가에 속해 있어도 국가를 주어진 운명이 아니라 하나의 옵션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스콧은 “통치를 피하는 재간”으로 표현했다.

중국 윈난성(위)과 필리핀 루손섬의 다락논은 동남아 지역에 전파된 전형적 집약농업 형태다.

해양지대는 집약농업의 채용이 더 힘든 조건이었다. 남양인이 이 해역에 널리 퍼져나간 것은 두 가지 기술조건 덕분이었다. 하나는 화전농법과 벼의 직파(直播) 등 초보적 농업기술로 채집 단계에 있던 원주민보다 우월한 생산력을 가진 것이고, 또 하나는 뛰어난 항해술로 생산력이 더 우월한 대륙세력의 추격을 따돌린 것이다.


통치를 “피하는 재간”과 “받는 재간”


스콧의 2009년 책 제목을 패러디한 마이클 소니의 〈통치를 받는 재간 The Art of Being Governed〉(2017)은 명나라 동남해안 지역 사회사를 연구한 책이다. 소니는 자기가 살핀 지역 주민들이 스콧의 조미아 주민들처럼 “통치를 피하는” 옵션을 갖지 못했다고 거리를 둔다.

과연 그럴까? “재간(art)”이란 말이 중요하다. 주민이 국가를 충성 아닌 재간으로 대한다는 것이다. 국가의 힘이 강하든 약하든 주어진 국가의 힘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고 자기 이득을 위해 재간을 피운 실리적 태도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통치를 받는 재간”도 본질적으로는 “통치를 피하는 재간”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다.

자기 이득을 위한 피지배자의 소소한 노력을 소니는 ‘일상정치(everyday politics)’라 부른다. 그는 푸젠(福建) 지역과 같은 일상정치가 명나라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다고 본다. 그런데 푸젠은 송나라 이후에야 중화제국의 통치가 세워진 곳이다. 제국의 틀이 먼저 자리 잡혀 국가 이념이 확고한 곳에서는 ‘일상정치’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았을 것 같다. 지금의 중국에서도 열성적인 북방인과 실리적인 남방인의 정치적 성향이 대비된다.

중국 서남부 광시-윈난-구이저우(廣西-雲南-貴州) 일대는 지금까지도 한화(漢化) 수준이 낮은 곳이다. 동남부는 그보다 한 발짝 앞서서 한화가 진행된 곳이다. 12세기 이전에 중국 남해안에서 한화가 확실했던 곳은 광둥(廣東)의 일부 지역뿐이었다.

남중국 일대의 사회적-문화적 상황에는 한화 이전의 전통이 아직도 짙게 깔려 있다. 동남아 지역과 연결되는 전통이다. 동남아 화교의 민국혁명(1911) 지원, 공산군 대장정(1934-1936)에서 남방 학까(客家)족의 역할, 모두 국가를 ‘이념’ 아닌 ‘재간’으로 대하던 전통의 복류(伏流)를 보여주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김영옥 기자
중국 인구의 8%가 안 되는 학까족의 역할이 근대사에서는 대단히 크다. 태평천국(1850-64)의 최고지도자 6인 중 홍수전(洪秀全) 등 4인이 학까족이었다.
항일시기 공산군의 양대 주축 팔로군과 신4군의 사령관 주더(朱德, 1886~1976, 사진 왼쪽)와 예팅(葉挺, 1896~1946, 오른쪽). 둘 다 학까족이었다. 1934년 장정에 나선 공산군 8만6천 명 중 70%가 학까족이었고 그 후 당과 군 간부 중에 학까족의 비중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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