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엔 늑장 골프 절대 안하겠다”[정현권의 감성골프]
매년 이 맘이면 골퍼들은 저마다 새해 목표를 세운다. 시즌마다 내게도 새해 골프 소망이 있었다.
초보 땐 제발 99라도 좋으니 백돌이 신세를 면하고 싶었다. 스코어 카드에 도대체 100이라는 숫자를 들고는 게임 자체가 불가능했고 그들과 어울리기조차 부끄러웠다.
캐디에게도 눈치가 보였다. 처음으로 98타를 치고 귀가해서 하도 설레 잠을 설친 기억이 새롭다. 그동안 움츠렸던 날개를 펴고 필드에서 당당히 내꿈을 펼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새장에 갇혀 있다가 세상 밖으로 나온 느낌이었다.
그 다음해엔 80대 진입이 목표였다. 보기 플레이어라는 험난한 허들을 넘는 과제였다. 90대에서 80대로의 비상은 결코 간단치 않다.
스마트스코어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한국 남자 골퍼 평균 타수는 92타, 여자는 94타였다. 80대 타수는 상당한 고수다. 이 레벨은 고수나 하수 누구와도 어울리는 실력이다.
돌이켜보면 80대로 접어들었을 때가 내 골프인생에서 가장 전성기였다. 어쩌다 90대로 올라가면 스트레스로 불면의 밤을 보내기도 했다.
난이도가 높은 골프장에선 금방 90대로 올라갔다. 조금만 방심하거나 컨디션이 나빠도 이카루스의 날개처럼 그냥 90대로 주저앉는다. 골프장에서 귀가해 짐도 풀지 않고 곧장 연습장으로 달려갔다.
박영민 한국체대 골프부 지도교수는 “엄격하게 골프 룰을 적용해서 80대를 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며 “80대라고 밝히는 아마추어 10명 중 한두 명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한다.
전반에 1~3타를 오버하는 준수한 스코어를 가져가다가도 후반에 무너져 싱글의 꿈을 접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희한하게도 70대 타수를 의식하는 순간 마지막 1~2홀을 남기고 주저앉았다.
화창한 봄날 서하남 소재 캐슬렉스CC에서 드디어 그 순간이 왔다. 전반을 1타 오버로 마무리하고 브레이크 타임에 아무 것도 마시지 않고 멘털 관리에 들어갔다.
견조한 흐름을 이어가다 마지막 3홀에서 각각 보기로 3타를 기록해 전후반 합해 76타를 견인했다. 대망의 싱글 핸디 캐퍼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어느 누구에게도 싱글 핸디 캐퍼라고 내세우지 않았다. 이후 10번 골프장에 가면 한번 정도 70대, 6번 80대, 3번 정도는 90대로 들쭉날쭉이었다.
한 홀에서 기준 타수보다 2타 낮은 이글을 하겠다는 새해 포부를 가진 적도 있다. 티샷과 우드 샷이 일취월장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웰리힐리CC로 이름이 바뀐 강원도 횡성에 위치한 당시 성우리조트의 오스타CC 롱홀(파5)에서 이글을 잡았다. 80m를 남기고 웨지로 친 공이 그림처럼 경사를 타고 홀로 빨려 들어갔다.
10년이 지나면서는 홀인원 주인공의 꿈을 꾸었다. 박세리도 1998년 US여자오픈 우승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공식대회 첫 홀인원을 했기에 내게도 그런 기회가 올 것으로 상상했다.
카트로 이동하니 그린은 물론 주변에도 공이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고 홀로 가보니 타이틀리스트 1번이 선명하게 새겨진 공이 들어있었다. 지금도 생생하다. 족탈 불급인 언더 스코어를 빼곤 아마추어에게 가능한 모든 스코어를 경험했다.
그 다음부터 새해 골프 소망은 다른 형태로 나타났다. 어떤 해에는 노 더블 보기 플레이 계획을 세웠다.
아마추어가 18홀 동안 더블 보기를 하나도 범하지 않는다는 건 지난한 일이다. 자칫 OB를 내고도 더블 보기를 면하려면 고도의 멘털과 기술이 필요하다.
골프계에선 싱글 고수가 되기보다 노 더블 보기 플레이가 더 어렵다는 말도 있다. 22년 나의 골프 구력에도 손꼽을 정도이다.
원 볼 플레이라는 소박한 꿈을 꾸기도 한다. 18홀에 공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플레이를 이어나가기도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선 구질이 정확하고 설령 방향에서 벗어나더라도 발품을 팔고 눈도 밝아야 공을 분실하지 않는다. 18홀을 함께 하면 이리 저리 맞아서 까인 공과 정이 든다.
어느 해에는 샷을 하기 전에 가라스윙(연습스윙)을 없애겠다고 다짐했다. 무척 어려웠다. 왠지 맞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슬로(느림보) 플레이어라는 오명을 받는 골퍼는 올해엔 연습스윙을 없애보는 것도 방법이다. 오래 버틴다고 샷이 잘 나오는 건 아니다.
걷기를 목표로 세우는 골퍼도 있다. 홀 간 이동거리가 길거나 경사가 심하지 않으면 18홀 내내 걸으면 1만보 정도이다. 건강 챙기는 골프를 지향한다.
일본 특파원을 지낸 후배는 제대로 스코어 적기를 새해 골프 목록에넣었다. 특별한 상황을 빼곤 첫홀과 마지막홀 일파만파, 멀리건, 컨시드, 공 터치 등을 모두 없애고 룰대로 골프를 한다.
필자도 한창 80대 초반을 구사하던 어느 날 함께 룰을 엄격하게 준수하며 95타를 기록했다. 동반자 모두 보람 있는 골프라고 입을 모았다.
필자의 올해 골프 목표는 균형이다. 몰입 80, 명랑 20을 나만의 황금비율로 잡았다. 진정성 있게 임하면서도 즐거운 골프를 지향한다.
멘털 관리한답시고 필드에서 끝끝내 입을 다물거나 스트레스로 잠을 못 이룰 정도로 스코어에 매달리고 싶진 않다. 골프를 중심으로 일상을 조정하는 삶이 과연 바람직한지도 성찰한다.
숱한 시간과 열정, 그리고 비용을 골프에 쏟는 동안 혹시라도 내가 놓치는 더 소중한 삶의 가치가 있는지 살펴본다.
정현권 골프칼럼니스트/전 매일경제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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