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어때]우리 사회를 보듬는 '중첩적 합의'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 양심적 병역거부 등
美철학자 존 롤스 '정치적 자유주의' 살펴
한정승인은 상속인이 상속으로 취득할 재산의 한도 내에서만 고인인 피상속인의 빚을 갚겠다고 가정법원에 신청하는 제도다. 상속인은 자신이 상속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시점부터 3개월 안에 신청해야 한정승인이 인정된다. 단 상속재산보다 상속 부채가 더 많은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될 경우 이를 인식한 날부터 3개월 안에 다시 한정승인을 신청할 수 있는데 이를 특별한정승인이라고 한다.
2020년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특별한정승인과 관련한 판결이 논란이 됐다. 당시 불과 6살에 상속인이 된 A씨가 성인이 된 뒤, 뒤늦게 부친의 부채를 인지했다며 부친의 부채를 책임질 수 없다는 취지의 소를 제기했다. 당시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A씨가 미성년일 때 법적 대리인인 모친이 부친의 부채를 인지했다고 판단해 A씨를 특별한정승인 사례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결국 A씨는 미성년일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채를 책임져야 했고 해당 전원합의체 판결이 논란이 되자 국회가 2022년 12월 ‘미성년자 빚 대물림 방지’를 위한 민법 개정안을 의결해 A씨와 같은 사례가 다시 나오지 않도록 조치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최근 출간한 저서 ‘판결 너머 자유’에서 이 전원합의체 판결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며 미성년자들의 복리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나타낸다. 법률의 해석도 중요하지만 부친의 유고조차 인지하기 어려운 나이에 채무를 떠안게 된 A씨의 사정을 좀 더 보듬어줄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전원합의체에 앞서 1, 2심에서는 A씨가 승소한 재판이기도 했다.
‘판결 너머 자유’에서 김영란 전 대법관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내용을 되짚어보고 그 의미를 살핀다.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 양심적 병역거부, 성전환자 성별 정정, 군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 부동산 명의신탁, 손자녀 입양 등의 판결을 다룬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분석한 책을 꾸준히 냈다. 2015년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를, 2019년 ‘판결과 정의’를 출간했고 이번이 세 번째 책이다.
‘판결 너무 자유’에서는 미국 정치철학자 존 롤스(1921~2002)의 ‘정치적 자유주의’ 이론에 입각해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살펴본다.
롤스는 근대 민주사회란 시민들의 종교적ㆍ철학적 세계관과 도덕적ㆍ미학적 가치에 화해 불가능한 차이가 존재하는, 다시 말해 신념체계가 통일되지 않은 공동체로 봤다. 따라서 롤스는 ‘상반되지만 합당한’ 신념체계들이 공존하는 합당한 다원주의 사회를 지향했다. 이를 위해 정치(정치는 정당 간 권력 다툼이 아니라 헌법의 핵심 사항들과 기본적 정의의 문제들을 의미)적 영역에서 ‘공적 이성(Public Reasons)’에 의한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김영란 전 대법관은 중첩적 합의란 가치관, 세계관, 진리에 대한 신념이 다르더라도 사회적 질서와 관련해 공통된 부분이 있어 성립되는 합의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앞서 특별한정승인의 사례에서 김영란 전 대법관이 언급한 미성년자들의 복리가 중첩적 합의와 연관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롤스는 중첩적 합의란 포괄적 신념체계 간에 합의점을 찾는 것을 의미한다며 특히 중첩적 합의는 종교적, 철학적, 도덕적 신념체계들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전 대법관은 우리 사회에는 유교 등 전통적인 사상을 토대로 하는 공동체적인 관념이 강하게 남아 있어 때로 중첩적 합의를 끌어내기 어려운 면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와 관련 2008년 제사 주재자와 관련한 전원합의체 판결을 살펴본다. 당시 전원합의체는 장남 또는 장손자 등 남성 상속인을 제사주재자로 우선한다고 판단한 것은 더이상 조리(條理)에 부합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김 전 대법관은 우리 사회가 다양한 신념체계가 표출되는 다원주의 사회로 가고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롤스가 지향했던 합당한 다원주의 사회의 형태인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나타낸다. 되려 다양한 목소리가 나오면서 관련된 많은 사안에 여론의 향방이 극단적인 대결로 치달아서 되려 다양한 목소리의 설자리가 좁아지는 모순적인 상황에 처해있다고 지적한다. 그 결과 토론은 없이 표결만 남고 동조자를 끌어들여 다수를 확보하는 것만이 중요한 사회가 되고 있다며 우려를 나타낸다.
이러한 염려를 반영해 김 전 대법관은 책의 서문에서 소설가 이청준이 1971년에 발표한 중편 소설 ‘소문의 벽’을 언급한다. 우리 사회의 좌우 이념대결이 극에 달했던 시절, 밤이면 사내들이 무작정 가정집에 들이닥쳐 전짓불(후레쉬 불빛)을 비추며 어느 편인지를 따졌던 이야기를 뼈대로 하는 소설이다. 김 전 대법관은 "이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전짓불을 들이대는 것 같다"며 "기성 미디어는 물론,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많은 미디어들이 전짓불을 들고 ‘당신은 누구 편입니까’라고 묻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분열의 시대이기 때문에 김 전 대법관은 대법원의 전원합의체에 주목한다. 전원합의체가 중첩적 합의를 끌어낼 수 있는 공적 이성의 한 형태로 보기 때문이다.
롤스는 ‘정의론(1973)’, ‘정치적 자유주의(1993)’ 등의 저술을 통해 현대 정치철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가 유명해진 계기가 1982년 롤스의 정의론을 비판한 저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를 출간하면서부터이기도 하다. 샌델 교수는 ‘정의란 무엇인가’ 6장에서 롤스의 정의론에 비판적 견해를 드러내기도 한다.
현대 정치철학에서 비중이 큰 롤스의 이론을 국내 판결과 접목해 살펴볼 수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다만 익숙지 않은 법률 용어 탓에 전원합의체 판결 내용을 분명하게 파악하기가 다소 어렵다.
판결 너머 자유 | 김영란 지음 | 창비 | 248쪽 | 1만8000원
박병희 기자 nut@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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