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묘' 감독이 밝힌 화림 나이, 1990년 '흉흉한' 소문 뭐였길래
[이진민 기자]
파도 파도 재밌는 <파묘>의 숨은 이야기, 그 안에 반전이 있었다. 누적 관객 수 851만 명 돌파(15일 오전 기준), 어느덧 천만을 향하는 <파묘>의 장재현 감독은 지난 13일 강남구 메가박스 코엑스에서 GV(관객과의 대화)를 가졌다.
촬영 비하인드부터 스토리 해석까지 장 감독은 풀리지 않았던 영화 속 실마리를 공개했다. 그중 팬들의 반응이 가장 뜨거웠던 순간은 캐릭터들의 나이를 공개할 때였다.
서로 다른 세대 간의 화합을 그리고 싶었다던 장 감독은 캐릭터들의 나이 또한 다양한 연령대로 구성했다. 여러 캐릭터 중 눈길을 끄는 건 이화림(김고은 분)의 나이. 그는 1990년에 태어난 '백말띠' 여성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최대의 여아 낙태가 펼쳐졌던 해에 태어난 이화림이 하필 영화 속 유일한 여성 캐릭터라니. 이런 기묘한 우연이 또 없다. 어쩌면 태어나지 못했을 이화림, 이젠 그의 굿판이 구슬프게 들린다.
▲ 영화 <파묘> 스틸 이미지. |
ⓒ ㈜쇼박스 |
1990년, 당시에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건 "백말띠에 태어난 여자는 팔자가 사납다"는 속설이었다. 이 터무니없는 말은 남아 선호 사상을 더욱 부추겼고 결국 수많은 90년대생 여성들이 세상의 빛도 보지 못한 채 죽었다. 1990년에 태어난 신생아의 남녀 성비는 116.5명. 즉, 여자아이가 100명 태어날 때 남자아이는 116.5명 태어났다(출처 : 통계청).
죽지 않고 살아남은 '백말띠' 여성들에겐 꼬리표가 따라왔다. 자라면서 "백말띠 여자들은 기가 세다", "너희 때에는 여자아이들이 많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듣거나 그의 팔자를 안타깝게 여기는 시선을 받아보는 것. 그것이 1990년대생 여성들의 공통 분모이다. 그러나 팔자가 드센 여성들은 백말띠만이 아니었다.
호랑이띠, 용띠인 여자들도 팔자가 드세다고 하였기에 1987년, 1988년에도 대대적인 여아 낙태가 이뤄졌다. 기울어진 90년대생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절대 자연스럽지 않은 이유다. 도대체 팔자가 드센 것이 한 생명을 낙태할 이유가 될 수 있는가. 애초에 팔자가 드세다는 말부터 여성에게만 통용되는 표현이다. 흔히 남성이라면 "자신감 있다", "당당하다", "멋있다"고 평가할 성격이 여성에겐 "더러운 팔자"라는 모욕으로 일축된다.
그런 난관을 뚫고 <파묘>의 이화림이 태어났다. 관람객들은 GV를 통해 이화림의 나이가 공개하자 영화 설정이 더욱 신선하다는 반응이다. 이에 "사나운 팔자를 가진 여자가 무당이라니 재밌다", "백말띠를 가진 캐릭터라고 하니 매력적이다", "여아 낙태율이 최악이던 해에 태어난 여성 캐릭터라서 흥미롭다" 등 이화림이 태어난 연도가 캐릭터의 흥미도를 높인다는 의견이 쏟아졌다.
▲ <파묘> 스틸컷 |
ⓒ 쇼박스 |
백말띠에 태어나면 팔자가 사납다던데, 이화림에겐 낭설이 아니었다. 극 중 이화림의 직업은 무당. 그는 귀신을 섬겨 길흉을 점치고 굿을 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영화 시작부터 알 수 없는 귀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인상을 찌푸린 이화림의 표정을 보는 순간, 직업이 무당인 걸 제쳐두어도 그의 성격이 평범하지 않다는 걸 직감할 수 있다.
극 중 이화림은 친절한 여성이 아니다. 무당이란 직업과 반대되는 풍수사, 장의사인 상덕(최민식분)과 영근(유해진 분)에게 불만을 드러내고 자신보다 어린 남자 무당인 봉길(이도현 분)에겐 엄격한 스승 같기도 하다. 시종일관 속내를 알 수 없는 이화림의 얼굴이 굿판을 위해 일그러졌다가, 그야말로 '신들린' 순간을 맞이할 때 관객은 그의 사나운 팔자 속에 함께 뛰어들 수밖에 없다.
또한 이화림은 이야기 전개를 결정하는 치트 키 캐릭터다. 기이한 병이 대물림되는 집안의 장손에게 의뢰받게 되고, 화근이 조상의 묫자리임을 알게 된 화림은 이장을 권유하며 상덕과 영근을 판에 끌어들인다. 그러나 "묘 하나 잘못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 아느냐"며 반대하던 상덕을 꺾는 것은 화림이다.
의뢰인의 재산 때문인지, 안타까운 사연 때문인지 마음이 흔들린 화림이 상덕을 설득하게 되고 그때부터 <파묘>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화가 흘러가며 어느 인물이 위기를 맞이하거나, 다른 인물들이 흔히 말하는 '빌런'을 만났을 때 최전선에서 그들을 보호하고 진두지휘하는 역할은 화림이다. 핵심 캐릭터 중 여성 캐릭터는 화림 하나뿐인데 그 무게감은 결말 부까지 이어진다.
<파묘>에는 화림 말고 딱 봐도 팔자 사나운 여성 캐릭터들이 대거 출연한다. 또 다른 여성 무속인 오광심(김선영 분), 박자혜(김지안 분)가 그 주인공이다. 영화 속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귀신을 불러내고 그를 처단하는 세 여성의 굿 한판을 보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여성의 사나운 팔자? 까짓것 여성을 지키기 위한 부적쯤이려나. 유순하지 않아서 더욱 끌리는 <파묘>의 여성들이다.
'백말띠' 이화림에 관객들이 환호한 이유
<파묘> 팬들은 영화 줄거리를 기반으로 팬아트를 그리거나 자신만의 해석을 덧붙이는 등 일방적인 영화 감상을 넘어 활발하게 창작과 소통의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에 배급사 '쇼박스'는 팬아트에서 모티브를 얻은 특별 포스터를 공개하며 화답했다. 그만큼 팬들은 <파묘>에 얽힌 사소한 이야기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이화림이 1990년에 태어난 백말띠 여성'이라는 숨은 설정이 공개되었고 팬들의 호응은 뜨겁다. 팔자 사나운 해에 태어난 여자 무당, 그것만으로 이화림이란 사람이 그려진다.
현실에서 사라진, 그리고 영화에서 다시 만난 '백말띠' 여성 이화림. 괜히 '살아줘서 고맙다'는 낯간지러운 고백만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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