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한양행, '사유화' 우려에도 '28년 만에 회장직 부활' 결정

이춘희 2024. 3. 15. 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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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주총서 회장·부회장직 신설 확정
유일한 손녀 "권력 한명에 집중 우려"
이정희 의장 "회장직 오를 생각 없어"

"회장직 신설은 권력을 한쪽으로 집중시킨다. 유일한 박사가 강조했던 건 회사는 직원, 주주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유일링 유한학원 이사·유일한 박사 손녀)

"수없이 말했지만 회장직이 생겼다고 해서 오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이정희 유한양행 이사회 의장)

유한양행 창업자인 고 유일한 박사 [사진제공=유한양행]

'100년 기업' 유한양행에 28년 만에 다시 회장직이 생겼다. 회장·부회장직 부활 추진이 알려지면서 창업주 고 유일한 박사의 유지를 따라 '주인 없는 회사'로 운영돼왔던 유한양행을 특정인이 사유화하려는 시도라는 비판이 거셌다. 다만 그 배후로 지목된 이정희 유한양행 이사회 의장(전 유한양행 대표)은 이 같은 의혹에 "추호도 없는 생각"이라며 선을 그었다.

15일 오전 서울 동작구 유한양행 본사에서 열린 정기주주총회는 시작 전부터 시끄러웠다. 회사 밖에서는 회장직 신설에 반대하는 직원들이 모금해 마련한 트럭 시위가 이어졌다. 트럭에는 "유일한 박사는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일가족 그 누구도 경영에 참여시키지 않았다" 등의 문구가 연이어 송출됐다.

논란은 주총이 열리고 있는 사옥 안에서도 이어졌다. 주총장인 4층 대연수실 안팎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오갔다. 유일한 박사의 손녀인 유일링 유한학원 이사는 이미 주총 전부터 "회장직 신설은 권력을 한쪽으로 집중시킨다"며 "유일한 박사가 강조했던 건 회사는 직원, 주주들의 것이어야 한다는 것" 등 성토를 이어갔다. 다만 이날은 발언을 자제했다. 유 이사는 "주총을 방해하려는 게 아니라 회사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참석했다"며 "회장직 신설에 대한 우려는 이미 표명했지만 오늘은 해당 안건이 가결되더라도 의견을 내진 않겠다"고 말했다.

총회에 참석한 다른 주주들도 격론을 이어갔다. 그간 늘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열렸던 유한양행 주총은 이날은 직접 목소리를 내기 위해 몰려든 주주들로 가득 찼다. 앉을 자리가 부족한 데 대한 성토의 목소리를 내는 주주도 여럿 있었다.

이 같은 논란이 불거진 건 이번 주총에서 회장과 부회장 직위를 신설하는 내용의 정관 개정안이 상정됐기 때문이다. 1926년 창립 이래 100년이 돼가는 유한양행의 역사 속에서 '회장'을 역임한 건 단 두 명뿐이다. 창업주였던 유일한 박사와 유 박사를 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연만희 고문뿐이다.

유한양행은 유일한 박사의 "기업활동을 통해 얻은 이윤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되돌려줘야 한다"는 소신에 따라 주인 없는 기업으로 운영돼 왔다. 유 박사는 1936년 회사를 개인 소유에서 주식회사로 바꿨고, 1939년에는 국내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해 본인 소유 지분 52%를 사원들에게 나눠줬다. 연 고문은 이 같은 뜻이 이어질 수 있도록 재임 시절 고위직에 '직급 정년제'를 도입했다. 임원급은 6년 연임 후 추가 승진이 없다면 퇴임해야 했다. 대표 역시 예외는 아녔다. 실제로 이 의장을 포함해 모든 유한양행의 대표들은 취임 후 6년 후에는 대표직에서 내려왔다.

이정희 유한양행 대표가 23일 국회에서 열린 지구촌복지포럼에 참석, 진정한 나눔과 실천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고 있다./윤동주 기자 doso7@

그러나 이 의장은 퇴임 후 회사를 떠난 다른 대표들과 달랐다. 대표에서 물러난 후에도 비상무이사이자 이사회 의장으로 회사에 남았다. 9년째 이사회를 이끌고 있다. 1978년 유한양행에 입사한 이 의장은 2015년 대표직에 올랐다. 이후 유한양행의 적극적 연구개발(R&D) 투자를 이끌며 폐암 치료제 렉라자 개발을 진두지휘하는 등 유한양행의 재도약을 위한 초석을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다만 회장직 신설이 추진되면서 자연스레 이사회 의장직을 유지하고 있는 이 의장이 배후 실권자를 넘어 직접 회장에 오르려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졌다. 또한 유한양행 최대주주인 유한재단의 이사회에서 창업주 일가인 유일링 유한학원 이사가 배제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역시 경영권 장악을 위한 밑작업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다. 미국에 거주 중이던 유 이사가 급거 귀국해 직접 주총장에까지 모습을 드러낸 배경이기도 하다.

다만 조욱제 대표는 "회사 규모가 점점 커지고 있기 때문에 정관 개정이 필요하다"며 "유명한 인사를 모실 때는 사장·부사장을 조건으로 제시하는데 기존에는 상당히 어려운 조건이어서 정관을 수정하는 게 좋겠다는 컨설팅을 받았다"고 이번 회장직 신설의 이유를 설명했다. 유한양행은 정관 개정안이 공개된 후 회사가 점차 성장하면서 이미 사장이 2명(조욱제 대표·김열홍 R&D 총괄사장)이고 부사장도 6명에 달하는 만큼 임원의 직급을 조정할 필요성이 있다고 누차 강조해왔다.

또한 마찬가지로 부회장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진 조 대표 역시 "나이도 많고, 3년 후에 회사를 나갈 것"이라며 "지금 회사에서 회장을 하려고 하는 사람은 정말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유한양행 비상무이사로 재선임된 이정희 이사회 의장이 주총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이 의장은 "회장직에 오를 생각은 추호도 없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사진=염다연 기자]

논란이 이어졌지만 결과적으로 이날 주총에 상정된 안건은 참석한 의결권 중 95%의 찬성으로 모두 가결됐다. 유한재단(15.8%)과 유한학원(7.4%)이 23.2%로 최대 주주인 만큼 각종 논란에도 불구하고 주총 전부터 무난한 통과가 예상됐다.

이에 따라 유한양행은 앞으로 언제든 이사회의 결의에 따라 회장과 부회장을 선임할 수 있게 됐다. 이 의장은 계속해서 비상무이사를 맡게 됐고, 조 대표도 연임에 성공했다. 회사는 주총 중 긴급 이사회를 열고 조 대표를 대표로 재선임했다. 지난해 유한양행에 합류한 김열홍 R&D 총괄 사장도 사내이사로 정식 합류했다.

이춘희 기자 spring@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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