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을찍는여자들] "우유 배달이나 할까?" 제 말부터 들어보세요
4대보험 없는 주부들이 쓰는 '점을 찍는 여자들'은 끊임없는 시도를 통해 그 무엇이 될 수 있다고 믿는 여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편집자말>
[이지아 기자]
두 달여의 길고도 긴 겨울방학이 끝나고 세 아이가 모두 학교로 돌아갔다. 몸이 편해진 것도 잠시, 마음은 불편해진다. 혼자 보내는 이 긴 시간에 뭘 해야 하나? 알바라도 해서 적은 돈이라도 벌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어김없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요즘은 주부들이 어떤 알바를 할 수 있을까 궁금한 마음에 맘카페 '구인 게시판'에 들어갔다. 새로울 것이 별로 없어 보이는 구인 글 가운데서 '새벽 우유 배달원 구합니다'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주부들 마음은 비슷한 걸까. 관심이 있다는 댓글이 꽤 달렸다. 또, '새벽 우유 배달 할 만 한가요?'라며 궁금해 하는 게시글도 있다. 하고는 싶지만 겁이 나기도 하는 글쓴이의 마음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나도 딱 그랬으니까.
▲ 새벽 우유 배달. 아이들이 잠든 시간을 활용해서 단돈 몇 십 만 원이라도 버는 게 어디냐 싶었다. |
ⓒ elements.envato |
4년 전이다. 살림살이는 어렵고 세 아이를 키우면서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때 떠오른 게 새벽 우유 배달이었다. 아이들이 잠든 시간을 활용해서 단돈 몇 십 만 원이라도 버는 게 어디냐 싶었다. 결심하기까지 고민과 망설임도 있었지만, 기쁜 마음도 작용했다.
'일부러 시간 내서 운동도 하는데 덤으로 돈도 벌면 얼마나 좋아.' 서러워질 법한 마음을 애써 포장했다. 배달을 하면서 음악을 듣거나 영어 공부를 하는 것도 딱이다 싶다. 우유를 보냉백에 넣으면서는 그 가정을 축복해야겠다고 마음먹으니 뭔가 좋은 일을 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우유 배달을 앞두고 나는 이런 상상을 했다.
이어폰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경쾌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간다. '축복합니다'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우유를 넣는다. 일을 마치고 나니 저 멀리 태양이 떠오른다. 누구보다 아침을 일찍 맞이한다는 생각에 흐르는 땀방울을 닦으며 뿌듯해한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더욱 활기찬 모습으로 엄마로서의 하루를 시작한다. 오! 완벽해!
그것이 얼토당토않은 핑크빛 환상이라는 것을 대차게 깨닫는 데는 단 몇 분이면 충분했다.
몰랐다, 엘리베이터에 적힌 숫자의 의미
새벽 세 시가 넘은 시간, 아파트 주차장은 그야말로 무법 천지였다. 여기저기 이중주차를 해놓은 차들 때문에 조심하다보니 아예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담당한 아파트는 어찌된 게 1-2호 라인 옆에 3-4호 라인이 있지 않았다. 당연히 옆으로 돌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네?! 미로에 갇혀 버린 느낌이 들면서 그때부터 진땀이 나고 넋을 잃을 지경이 되었다.
출입구를 찾아 이리 뛰고 저리 뛰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나면 혼이 나갔다. 잠시 정신을 놓치고 나면 더 큰 일이 닥쳤다. 모두가 똑같이 생긴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지금 몇 동, 몇 호 라인에 와있는 거지?' 머릿속이 새하얘지는 것이다.
▲ 엘리베이터에 써져 있는 숫자의 의미 우유 배달을 시작하고 나서야 엘리베이터에 낙서처럼 적혀있는 숫자의 의미를 알았다. 기물파손이라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감사한 마음이 컸다 |
ⓒ 이지아 |
몰랐다. 엘리베이터에 적혀 있는 저 숫자의 의미를. 정확히 말하자면 숫자가 적혀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알지 못했다. '유레카'에 버금가는 그 발견의 기쁨이란! 그리고 저절로 "감사하다"는 말이 나왔다. 누군가가 적어 놓은 그 숫자 덕분에 그나마 왼쪽으로 갔다, 오른쪽으로 갔다 몸이 고생하는 횟수를 덜 수 있었다.
물론, 그래도 초보 우유 배달원의 좌충우돌은 이어졌다. 겨우 100 가구도 안 되는 집의 우유를 배달하는 데, 3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마음은 더없이 급해졌고 그럴수록 더욱 헤맸다. 그러다 사건이 발생했으니 주차하면서 그만 다른 차와 부딪히고 만 것이다. 그것도 외제차와.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참담한 심정마저 되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다행히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연락처와 사고 경위를 적어 문자를 보내고 나머지 배달을 하러 가는 길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다 그만두고 집으로 도망가고 싶은 걸 끅끅거리며 참았다. 여기서 그만두면 다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오늘 맡은 일이라도 끝내자!' 오로지 그 하나의 마음만 붙들었다.
▲ 엘리베이터에 아예 동,호수를 인쇄해서 붙여 놓은 아파트 겨우 한 번 우유 배달을 했을 뿐이지만 누군가의 수고를 배려하는 이런 변화가 너무 반갑고 고맙게 느껴진다 |
ⓒ 이지아 |
그래도 배달을 하려거든
겨우 하루의 기억이 너무도 강렬해서였는지, 여전히 엘리베이터에 적힌 숫자를 보면 감사하다. 누군가는 공공기물 파손이라고, 자기가 조금 편하자고 한 이기적인 행동이라고 비난도 하지만 나에겐 '배려'였다. 게다가 일부 아파트에서는 아예 동호수를 인쇄해서 안내해주고 있는 걸 보니 그것이야말로 '더할 나위없는 배려'라고 느껴져 내가 다 감사하다. 나처럼 처음 배달 알바를 시작한 분들에게 이 숫자는 그야말로 등대의 역할을 할 것이다.
단 한 번의 우유 배달 알바 이후 '배달이라도 할까?'라고 쉽게 말하지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이 쉽게 하는 것 같아 보인다고 나에게도 쉬울 거라는 것은 착각이다. 나에게는 어렵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쉽게 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러니 어떤 일도 내 기준으로 쉽다, 어렵다 단정짓지 말아야 한다.
만약 그때의 나와 같은 심정으로 새벽 우유 배달을 하고 싶은 주부가 있다면 무엇보다 운전을 잘 하고, 공간 감각이 좋은 사람이 하길 권한다. 나 같은 길치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자기가 사는 아파트 단지부터 공략하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무래도 익숙한 곳인 만큼 동, 호수를 몰라 헤매는 일은 줄일 수 있을 테니.
실전에 바로 들어가기 보다는 선배 배달원을 따라 한번 정도 예행연습을 하는 것도 필수다. 나의 경우, 인수인계를 해줄 선배가 갑자기 그만두는 상황이어서 바로 혼자 시작한 건데 뒤돌아 생각해보니 참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겨우 하루의 경험이라 큰 도움은 되지 않겠지만 '우유 배달 일은 어떤가요?' 나처럼 절실한 마음으로 묻는 주부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적어 본다.
딱히 경력이나 재주가 없는 주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알바는 뭐가 있을까 여전히 기웃거리지만 이제는 쉽게 덤비지 않는다. 대신, 글을 쓴다. 글을 써서 뭐가 된다는 보장도 없고 당장 돈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지만 그저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그게 내 인생이라는 그림에 하나의 점을 찍는 일이라고 믿으면서 말이다.
덧붙이는 글 | - 개인의 블로그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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