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서경식 선생께 늦은 애도를 표하며
[윤일희 기자]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죽음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지난해 12월 서경식 선생의 갑작스러운 영면 소식에 그랬다. 단 한 번 만나본 적도 대화를 나눈 적도 없지만, 마음 한 켠이 퀭해졌다. 일면, 평생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뇌했던 선생의 부유하던 영혼이 안식을 찾았겠구나, 잠깐 안도했다. 그래 봐야 죽음 너머의 세계를 알 길 없는 산 사람의 부박한 생각일 테지만.
코로나가 창궐하던 어느 때였을 것이다. 한겨레 신문에 연재되던 선생 칼럼에서 이가 저절로 빠져버린 사연을 읽고 공연히 가슴이 철렁했었다. 일흔 언저리 노인이 이가 빠지는 게 그리 이상할 리 없고, 선생은 그저 세월을 이길 수 없는 인간의 유한함과 쇠락을 언급했을 뿐이었는데, 생이가 빠지는 것을 상서롭지 않게 여겼던 엄마의 미신이 생각나면서 공연히 께름했던 기억이 부고 소식에 퍼뜩 떠올랐다.
고 서경식 선생(1951-2023)은 '자이니치'라 불리는 '재일조선인'이다. '재일조선인'은 한국 국적 소지자, 조선 국적 소지자, 일본 국적 소지자를 포함한다. 이들에게 '조선'은 "국가의 국민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선반도 출신, 조선 민족의 일원이라는 의미, 즉 국적이 아니라 민족적 귀속을 나타내는 기호"지만, 한 가지 정체에 귀속되기를 강요받는다.
그는 스스로를 "조국은 조선, 모국은 한국, 고국은 일본"인 복잡한 입장으로 정체했다. 이렇게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자이니치'에 대해 한국 사회는 얼마나 알려 하거나 이해하고 있을까.
한국 사회의 이해 부족은 무관심 탓도 있지만, 정부의 기피 조장이 더 큰 원인이다. 6천 명이 넘는 조선인이 살해당한 간토대지진 100주년 추모제에 참석한 정치인과 조선학교를 차별하는 일본에 저항하는 시민단체를 친북 운운하지 않았는가. 간토에서 살해당한 것이, 조선인으로 차별당하고 혐오 당하는 것이, 그들의 잘못이고 책임이란 말인가.
'자이니치'를 모르는 한국 사회에, 드라마 <파친코>가 방영되어 그나마 아주 조금 이들에 대한 약간의 역사 교육을 시킨 형상이다. 드라마는 잠깐이나마 간토대지진을 다루었고, 일본에서 험난한 삶을 살아낸 '자이니치' 3대를 그렸다. 한국인이 '재일교포' 정도로 인식하는 '자이니치'는, 고난을 견디고 성공한 아이콘인 손정의로 상징될 정도로 이해의 폭이 협소하다.
<파친코>에서도 도일한 선자가 얼마나 강렬한 생명력으로 삶을 견인했는가를 일깨우게 하는데, 이는 "활력 넘치고 생명력 왕성한" '자이니치'에 대한 전형을 만들며 착시를 일으키게도 한다. '자이니치'의 삶의 의지가 거짓이라는 것이 아니라, 노력과 성과만 비추고 추앙하는 것에 대한 반작용을 우려하는 것이다.
<서경식 다시 읽기>에서 그는 손정의의 능력주의(업적주의) 표상으로는 일본 내 차별 구조를 극복할 수 없으며, 오히려 손정의처럼 노력해서 성공하라는 교묘한 지배 장치가 작동하며 '자이니치' 내부의 차이, 복합적 차별, 일본의 억압을 받으면서도 일본인이 되고 싶어 하는 식민지성을 보지 못하게 한다고 우려한다. 일제의 식민지배, 한국전쟁과 분단이라는 역사에 대한 이해와 이를 극복하려는 탈식민지적 관점 없이는 '자이니치'와 그들 사회를 이해하는 일이 난망하다는 것이다.
'자이니치'에 대한 탈역사적 몰이해는 이들을 상처 낸다. 일본에선 "네 나라로 돌아가라"는 혐오 스피치에 피폭되고, 모국인 한국에선 모어도 못하는 재일교포쯤으로 여겨져 "일본에서 잘 살면서 왜 왔냐"며 냉대당한다. 일본에서 조선적을 가지고 사는 일에, 한국어를 못하는 '자이니치'로 살게 된 것에, 그들이 선택한 것이 그 무엇도 없지만, 일본도 한국도 이들을 가해한다.
▲ 디아스포라 기행 - 추방당한 자의 시선, 서경식(지은이), 김혜신,최재혁(옮긴이) |
ⓒ 돌베개 |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그는 기시감을 느낀 어떤 장소에서,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왜 지금이면 안 되는가"를 때때로 느꼈다고 고백한다.
그가 써온 미술 기행문은 대부분 그가 좋아하는 그림을 핵심에 두고 그를 그림 앞에 멈춰 서게 한 이유를 스스로 탐문해 가는 과정이다. 미학을 다루면서 그림을 그린 사람과 상황을 자신의 삶으로 맥락 짓는다.
▲ 나의 미국 인문 기행, 서경식(지은이), 최재혁(옮긴이) |
ⓒ 반비 |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은 1985년 그가 미국에 첫발을 디딘 날을 기록하지만, 이는 그의 개인적 여행이 아니었다. 1971년 한국으로 유학 간 형들 서승과 서준식이 간첩으로 조작되어 투옥되면서 형들의 석방 탄원을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건너간 것이었다. 사무적이고 고압적인 뉴욕단체사무소 직원이 "당신에게 15분 드리죠"라고 부여한 15분간, 그는 열성을 다해 형들의 위기와 구명을 어필하면서 <수틴의 초상>을 끌어들인다.
러시아 유대인 마을에서 무일푼으로 파리로 건너온 생 수틴의 자화상은, 미숙하고 완고하고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못했"던 청년 서경식이 낯선 미국 땅에서 시달렸던 이질감과 고립감을 유비한다. 그림 감상을 통해 디아스포라 감각을 올올이 새겨진 삶을 구체화하고 확장해나가는 그의 감각이 웅숭깊다. 마이너리티에게 드리운 길고 섬세하고 집요한 촉수가 슬프면서도 아름답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전란을 겪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참상, 이스라엘의 가자지구 폭격이 만드는 지옥도가 생중계되는 세상에서, 이 모든 전쟁을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동시키는 '빅브라더'의 나라 미국 땅에 있는 감상은 얼마나 아이러니했을까.
"내가 살아온 70년 넘는 동안 세계 각지에서 전쟁이 멈춘 시기는 없었다"는 회한은, 끔찍한 전쟁의 참상이 곧 '진부한 일'이 되고, 전쟁을 통해 평화를 배울 수 없는 제국주의적 국가주의적 광기에 진저리친다. 그럼에도 그가 쓰기를 멈추지 않은 것은 "인간 그 자체에 절망하지 않기 위해, 그것이 나의 끝나지 않는 '인문기행'의 한 페이지"이기 때문이다.
서경식 선생 사후 출판된 <나의 미국 인문 기행>은 애틋했지만 이전 책처럼 읽히지 않았다. 생전에 그가 쓴 어떤 책도 쉬이 책장을 넘기기는 어려웠지만, 그가 마지막을 몰랐을 마지막 글이어선지, 어딘가 남겼을 암시나 유언을 찾으려는 헛된 노력으로 마음이 흐트러졌다. 그의 마지막 기행에, 애쓴 일생에, 늦은 애도를 보낸다.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 게시
Copyright © 오마이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윤 대통령의 민생토론회 약속, 기막힙니다
- 대통령실 수석, "MBC 잘 들으라"며 기자테러 사건 언급
- "참담합니다" 강릉 바다 보고 탄식한 전문가
- 선관위도 아니라는데...'미세먼지 1' MBC 법정제재 추진
- 예상치 못한 '3파전'에 요동치는 울산 북구
- '한동훈 효과' 끝? 국민의힘 어쩌나
- 여성 정치인이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까닭
- 양당 '막말 리스크' 도태우·정봉주, 결국 모두 날아갔다
- 대법정으로 번진 '의대증원' 사태... "전체주의" vs. "골든타임"
- AFP "상추쌈 뱉는 이재명 영상은 '조작', 역방향으로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