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강석 목사 "흑사병 뒤 르네상스…코로나 이후 교회 확 달라져야" [백성호의 현문우답]
“이제는 ‘교회 4.0 시대’를 맞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교회가 위기를 맞게 될 거다.”
12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새에덴교회에서 소강석(62) 담임목사를 만났다. 그는 “중세 때 흑사병을 거치면서 결국 인문주의와 르네상스가 일어났다. 어쩌면 코로나 사태가 한국 교회에는 하나의 흑사병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소 목사는 『교회 3.0』이란 책을 쓴 미국의 저명한 목회자 닐 콜의 이름을 꺼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렇다. 미래 사회에는 종교가 사라진다는 거다. 닐 콜 목사는 그 이유를 ‘교회 1.0’부터 설명하고 있다. 우리에게는 솔루션이 필요하다.” 다들 종교의 위기를 말한다. 소 목사에게 그 해법을 물었다.
Q : 닐 콜 목사가 말하는 ‘교회 1.0’은 뭔가.
A : “초대 교회다. 핍박받는 사람들끼리 교제하는 폐쇄적인 교회다. 그럼 ‘교회 2.0’은 뭔가. 전성기를 구가하던 중세 교회다. 교회 제도와 시스템이 국가를 지배할 정도였다. 그때는 교황이 황제의 즉위식을 주도하지 않았나. 사실 지금의 한국 교회도 중세 교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요소가 꽤 있다. 놀라운 건 ‘교회 3.0’이다.”
Q : 그게 왜 놀랍나.
A : “위기를 말하기 때문이다. ‘교회 3.0’는 말한다. 기독교의 본질과 가치가 없으면 교회가 언제든지 소멸할 수 있다고 말이다. 이제는 그런 시대가 왔다. 이런 주장은 사실 세계적인 신학자 한스 큉 교수가 먼저 했다. 앞으로 현대인은 하나님에 대한 영적 갈망은 높아지나, 제도권 교회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게 될 거라고 했다. 한스 큉 교수의 안목이 닐 콜 목사에게로 확장된 셈이다.”
소 목사는 “그런 위기는 이미 우리 앞에 와 있다. 한스 큉과 닐 콜의 예언이 코로나 시대를 거치며 정말로 앞당겨졌다. 그래서 솔루션이 필요하다. 나는 그게 ‘교회 4.0’이라고 본다”고 짚었다. 그는 교회의 전통과 시스템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은 반드시 교회의 본질과 생명의 가치를 지탱하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거기에 성령의 임재와 운행이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소 목사가 제안하는 ‘교회 4.0’론의 요지다.
Q : 한국 교회, 코로나 사태 겪으며 무엇이 달라졌나.
A : “그동안 지켜오던 예배에 대한 전통과 형식, 교회 제도가 전부인 줄 알았다. 그런데 코로나 사태 거치면서 교인들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 전통이 다가 아니네. 공간이 다가 아니네.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려도 되네. 과거의 사회가 오프라인상의 연결이라면, 이제는 온라인 등을 통한 초연결 사회가 돼버렸다. 이게 대세다.”
Q : 코로나 사태 초기, 이걸 부정하는 목회자와 교인도 많지 않았나.
A : “맞다. 오프라인 예배를 고집하는 분들도 많았다. 너무 지나치게 현장 예배를 주장하면서, 한국 교회가 돌팔매질도 많이 당했다. 기독교에서 가장 숭엄한 게 예배다. 코로나 초기에 저는 교회가 자체 방역 시스템을 만들자고 교단에 제안했다. 정부에서 코로나 매뉴얼이 나오기도 전이었다. 뜻대로 되진 않았다. 당시에는 예배 축소와 온라인 예배에 대한 반감이 무척 컸다. ”
Q : 나중에는 그분들도 따라오지 않았나.
A : “그랬다. 결국 따라왔다. 교회 경영은 창의적이어야 한다. 교회의 조직문화도 마찬가지다. 그게 ‘교회 4.0’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스 큉 교수와 닐 콜 목사가 경고한 강을 건너갈 수가 없다.”
이 말끝에 소 목사는 중세 유럽의 흑사병 이야기를 꺼냈다. 클레멘스 6세(1291~1352) 교황 때 흑사병이 터졌다. 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무려 300년간 유럽에 흑사병이 돌았다. 교황은 인간의 죄로 인해 하늘이 내리는 벌이라고 했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성당으로 모였다. 성당만이 살 곳이라 여겼다. 결과적으로 성당이 흑사병 집단감염의 진원지가 되고 말았다. 사망자 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유럽 인구의 셋 중 하나가 죽었다.
소 목사는 “존 칼빈(장 칼뱅, 1509~1564) 때도 흑사병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서 공동체 살림을 꾸렸다. 흑사병이 터지자, 그곳을 격리 수용시설로 썼다. 격리자는 밖에 나오지 않았다. 창을 통해 밖을 보면, 성직자가 마당에 서서 기도를 해주었다. 예배를 볼 때도 성직자 중심으로 건강한 사람만 소수 모였다. 나머지는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도록 했다. 칼빈은 역사를 통해 배웠다. 우리도 역사를 통해 배워야 한다. 이 얼마나 창의적인 교회 경영인가.”
소 목사는 “한국 교회에게 코로나 사태는 하나의 십자가였다"고 정의했다. “십자가를 체험했으면 달라져야 하지 않나. 한 단계 초월해서 올라서야 하지 않나. 이제는 교회도 창의적 경영과 창의적 조직문화가 필요한 시대다.”
■ 시인이기도 한 소강석 목사
「 소강석 목사는
시인이다.
그는 말했다.
“나이 40이 되면서
윤동주가
내 안에 들어왔다.”
왠지 모를
미안함이었다.
“윤동주는
누구한테 첫사랑 고백도
못해보고,
여자한테 손수건 하나
못 받아본
저항 시인이었다.”
소 목사는
언젠가부터
빚진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
소 목사는
2000년 초에
윤동주의 고향
북간도의 용정촌을
찾았다.
“용정촌은
일제의 침략이 미치지 못한,
순혈적 민족주의가
살아있던 곳이다.
그 순혈적 지향이
그대로 살아있던 인물이
윤동주다.”
용정촌에서
윤동주를 찾다가
소 목사는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연을 알게 됐다.
윤하연은 갑부였고,
애국자였다.
독립운동가에게
독립 자금을 대는
인물이었다.
“할아버지의
그런 정신이
자연스럽게
윤동주에게
영향을 주었다.”
소 목사는
윤동주의 무덤을
찾았다.
용정촌에서 3km쯤
떨어진 공동묘지였다.
무덤의 뗏장이
하나도 없었다.
퍼석한 황토만
윤동주의 무덤을
덮고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소 목사는
수소문을 했지만
연변에는
뗏장이 없었다.
소 목사는
결국
상하이까지 연락해
뗏장을 구했다.
그리고
윤동주의 무덤을
그 뗏장으로
덮어주었다.
마치
일제의 고문으로
떨고 있는
알몸의 윤동주에게
이불을 덮어주듯이
말이다.
그후에
소 목사는
두 권의
책을 더 냈다.
하나는
시집 『다시, 별 헤는 밤』이고,
또 하나는
에세이로 쓴 윤동주 평전
『별빛 언덕 위에 쓴 이름』이다.
만주의 북간도와
일본의 릿쿄 대학과 도시샤 대학,
윤동주가 갇혔던
후쿠오카 감옥을
모두 순례한
소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윤동주를 생각하면
누구나
애처로운 마음이 든다.
그의 시를 읽으면
더 처연하다.
…
지금까지
윤동주 연구를 보면
대부분
인간의 보편적 가치와
자연의 서정성을 노래한
시인으로 해석하였다.
…
윤동주야말로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민족의 아픔과 상처를
시로 표현한
예언자적 저항시인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윤동주의 묘소에서
뗏장을 입힌 뒤,
소 목사가
무덤 앞에서
낭송한 자작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그 어떤 밤도
흐린 별 하나를 이기지 못하리.”
」
백성호 종교전문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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