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혜의 방방곡곡 미술기행] 보이는 대로 느낌대로…뻔한 그림 거부한 천재 이중섭

2024. 3. 15. 00:30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이중섭의 독특한 통영 풍경화


김인혜 미술사가
이중섭과 관련된 장소라면, 제주도를 먼저 떠올릴 것이다. 피란 시절 이중섭 가족이 살던 집이 서귀포에 남아있고, 근처에 이중섭미술관도 있어서다. 그러나 그가 제주에 머문 기간은 채 1년이 되지 않고, 거기서 제작한 작품도 많지 않다. 오히려 이중섭 생애 최고의 무대는 제주도가 아니라 통영이었다. 그의 대표작 ‘황소’, ‘흰소’, ‘달과 까마귀’ 등이 모두 통영 체류기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2년간 안정된 생활 작품도 꽤 팔려

이중섭은 1952년부터 2년 정도 통영에서 살았다. 나전칠기 기술자 양성소에서 강사로 근무하면서,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했다. 전시회도 열었고, 작품도 꽤 팔렸다. 이중섭은 좀처럼 풍경화를 그리지 않았지만, 통영에서만큼은 여러 점의 풍경화를 남겼다. ‘그림 같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아름다운 풍광을 지닌 고장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중섭이 70년 전 거닐었던 통영. 그 풍경을 따라서 우리도 여행을 떠나보면 어떨까.

「 바다와 산 손톱만큼 그린 ‘세병관’
세병관 올라 본 실제 풍경과 흡사

아련한 느낌의 ‘남망산 오르는 길’
덜컥 구입한 검사, 아내에게 숨겨

고흐 명화 배경들 찾아다니면서
국내 대가의 자취는 왜 찾지 않나

1954년 통영에서 열린 4인전 당시 이중섭 모습. 4인전에 함께 참여했던 공예가 유강열이 보관하던 사진을 유강열의 제자 신영옥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통영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갈 곳은 세병관(洗兵館), 옛 통영의 중심이다. 알다시피 통영은 통제영, 정확히는 삼도수군통제영의 준말인데, 경상도·전라도·충청도에 이르는 삼도의 수군을 여기서 모두 통제했으니, 대단한 해군 군사기지였다. 이순신 장군이 삼도수군통제영의 1·3대 통제사였다. 세병관은 통제영 건물 중에서도 제일 핵심 시설물이다. 이름도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만큼, 스케일이 남다르다. 경복궁 경회루, 여수 진남관에 버금가는 크기의 건물에다, 서유대 장군이 쓴 ‘세병관’ 현판은 실로 압도적이다.

이 세병관을 이중섭이 그렸는데, 그 그림이 좀 특이하다. 제목은 ‘세병관’인데, 대체 세병관의 뭘 그린 건지. 이 작품에는 빠른 붓질로 일종의 프레임이 둘러쳐 있고, 그 아래 한옥 지붕이 화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저 멀리 바다와 산 풍경이 손톱만 하게 끼어든 형국이다. 세병관 건물의 웅장한 맛이라고는 도무지 찾을 수 없다. 오히려 어딘가 찌그러진 느낌. 그는 왜 이렇게 세병관을 그렸을까?

이중섭, ‘세병관 풍경’, 1954, 개인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실제로 세병관에 가보면, 이곳이 여항산 아래 낮은 언덕 같은 지형을 그대로 활용해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사진 길을 따라 조금씩 올라가면, 여러 관문을 지나 문득 거대한 세병관에 이른다. 그런데 그때까지는 아래로 바다 풍경이 잘 보이지 않다가, 세병관 앞 마지막 섬돌을 딛고 올라서면, 비로소 갑자기 그 ‘손톱만 한’ 바다와 미륵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중섭은 아마도 이런 드라마틱한 시야의 반전 매력에 매료됐던 것 같다. 그는 건물 자체의 장대함에는 관심이 없었다. 대신 하나의 기둥이 만드는 프레임 사이로 내다보이는 오밀조밀한 복합적 풍경을 카메라 앵글에 구겨 넣듯 그렸다. 그러니까 그는 대단한 기념비적 대상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실제로 보았던 일상적 경험의 한순간을 포착했다. 그게 객관적으로는 사소한 것이라 해도, 나에게는 진실이니까. 이것이 이중섭이 사물을 보는 시각이었다.

문화재 된 나전칠기 기술자 양성소

세병관에서 통영 앞바다를 바라본 풍경.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통영의 옛 마을은 퍽 작았다. 온갖 물자가 들어오는 통영항에서 시작하여 통제영 건물에 이르는 그 주변이 전부였다. 이중섭이 1952년 머물렀던 나전칠기 기술자 양성소도 통영항 바로 근처에 있었다. 이 건물은 용케 보존되어, 최근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활어 횟집으로 운영되던 건물이었는데, 2019년 통영시가 사들였다.

실제로 가보면, 이 건물은 몹시 초라하다. 1950년대에는 통영의 공예산업을 부활시켜, 전쟁 통에도 수출 산업을 일으키는 데 공헌한 장소였겠지만. 어찌 보면, 이 양성소는 이순신 장군이 하던 일을 계승한 것이다. 이순신은 통영인들이 전쟁 중에는 무기를 만들고, 평화 시에는 공예품을 만들어 전국에 내다 팔아 생계를 잇게 했다. 그런 공방의 전통이 이 양성소로 이어진 것.

통영의 나전칠기 기술자 양성소 건물.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곳에서 나전칠기를 가르친 사람은 전설적인 공예가 김봉룡(1902~1994)이었다. 본래 통영 사람으로, 집이 세병관 가는 길에 있었다. 현재 통제영 주차장 부근에 ‘김봉룡 살았던 곳’이라는 비석이 무심히 서 있다. 그는 1925년 파리 세계장식공예품박람회에서 은상을 수상했던 나전칠기 명인이었다. 이 양성소에는 도쿄미술대학 출신의 건칠(乾漆, 마른 옻칠) 공예 대가 강창원(1906~1977)도 있었다. 이중섭을 포함해 이런 쟁쟁한 인물을 모셔 와 학생을 가르치게 했던 이는 유강열(1920~1976). 그는 전통미술에 대한 대단한 안목과 행정력, 추진력을 지닌 인물이었다. 스스로 판화가, 공예가, 실내건축 디자이너였고, 후에 홍익대 미대 공예과 창설을 주도했다. 이런 무리에 어울려 이중섭은 신나게 예술 활동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이중섭은 나전칠기 기술자 양성소에서 몇 발짝만 가면 보이는 주변 풍경들을 주로 그렸다. ‘통영항’, ‘충렬사’ 등 아름다운 풍경화를 많이 남겼다. 그중 ‘남망산 오르는 길’은 통영항 쪽에서 바다 건너 남망산을 향해 바라본 풍경을 담았다. 그런데, 이 작품도 현장에서 실제 풍경과 비교해 보면 참 묘하다. 바다 건너 그 먼 거리에서, 반대편 산 사이로 난 길이 그렇게까지 넓어 보이는 일은 실제로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중섭은 이유를 알 수 없지만, 산 사이로 난 그 길을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었고, 길 걷는 사람들의 뒷모습을 꼭 화면에 담고 싶었던 것이다. 나머지 풍경은 거의 꾸며 넣은 장치이다. 특히 화면을 지배하는 커다란 나뭇가지. 이런 나무는 실제로 없었을 것이다. 단지, 저 멀리 있는 풍경과의 거리감을 부여하려고 일부러 전경(前景)에 끼워 넣은 것이다. 이 나뭇가지로 인해 건너편 산이 더 멀고 아득해 보인다. 이중섭은 바로 그런 아련한 느낌을 노린 것이다.

이중섭, ‘남망산 오르는 길’, 1950년대, 개인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실제로 이 작품이 전시장에 걸렸을 때, 그 느낌에 매료된 이가 있었다. 한 검사가 한 달 치 월급을 탈탈 털어 이 작품을 샀다고 한다. 원래 타지가 고향인 이 검사는 그림을 보자 첫눈에 자신의 고향길이 떠올라, 작품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단다. 하지만 전쟁이 막 끝나고 생계도 힘든 시절, 그림이란 걸 사 오자 부인에게 엄청 혼났다고.

그러고 며칠 지나 이중섭이 직접 이 검사의 집에 찾아왔단다. 작품을 사준 게 고마워 드로잉을 한 점 더 공짜로 주겠다고 들고 왔다는 것. 그런데, 이 검사는 공짜라 해도 아내에게 들키면 또 구박받을까 두려워, 드로잉을 받지 않고 그를 문전 박대했다고. 나중에 이 소장가가 모 화랑에 작품을 팔면서 직접 들려준 이야기이다. 이미 판 작품에 드로잉을 얹어주겠다며 일부러 찾아온 이중섭의 행동이 참 천진해서 기록해둔다.

‘욕지도 풍경’ 배경 실제로 가파른 절벽

이중섭, ‘욕지도 풍경’, 1954, 개인소장. 작품의 바위는 강렬한 노란색인데, 실제로도 바위 색이 유난히 노랗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핑계를 대고 여행을 떠난다면, 욕지도까지 가야 한다. 통영항에서 출발하면 배로 약 1시간 반 거리. 배가 하도 느려서, 뭔가 속세의 속도감과는 다른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을 준다. 이중섭이 살 때도 욕지도 가는 일이 간단치는 않았을 텐데, 나전칠기 양성소 학생인 이성운이 욕지도 출신이라, 그의 안내를 받았다고 전한다. 그의 집에 머물면서, 이중섭은 ‘욕지도 풍경’을 그렸다.

‘욕지도 풍경’을 보면, 이 섬이 가파른 절벽 위에 놓여있음을 알 수 있다. 화면 왼쪽 가옥이 지붕 전체가 보이는 각도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바위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하고, 바닷물은 유독 요란하게 출렁인다. 불과 며칠 전 부근 해역에서 불의의 어선 전복 사고가 일어나, 이 출렁이는 바다가 더욱 야속해 보인다.

이중섭, ‘충렬사’, 1954, 개인소장. 충렬사는 이순신 장군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이중섭은 가파른 지형을 올려다보는 불안정한 구도를 택해 그렸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실제로 욕지도에 가면, 작품을 그린 장소를 통영시가 추적해 ‘이중섭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욕지도 항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제자 이성운의 구술에 따라 고증한 장소이다. 물론 지금은 그 앞으로 도로가 있어, 이중섭의 그림처럼 심한 절벽이라는 인상을 주지 못하지만, 욕지도는 전체가 깎아지른 절벽으로 이루어진 절경의 섬임이 틀림없다.

우리는 프랑스 남부 소도시에 반 고흐의 ‘까마귀 나는 밀밭’의 배경은 찾아가 보면서, 왜 정작 우리 미술가들이 남긴 자취는 따라가 볼 생각을 하지 않을까? 그런 단순한 의문에서, 이 연재가 시작됐다. 예술가는 용케 좋은 곳만 찾아다니며 사는 족속이 아닌가. 그러니 이들의 자취를 쫓다 보면, 우리도 방방곡곡 멋진 곳을 많이 가보게 되리라 기대해본다.

김인혜 미술사가

Copyright © 중앙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