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수 없는 것을 쓰는 작가 ‘죽음’을 쓰다

김남중 2024. 3. 14. 2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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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문학동네, 120쪽, 1만3500원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노르웨이 극작가 욘 포세. 그는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에서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설명하면서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쓰고 싶었다”고 말했다. AP뉴시스


스웨덴 한림원은 지난해 노벨문학상을 노르웨이 극작가 욘 포세(65)에게 수여하면서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목소리를 부여한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이라고 평가했다. 포세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목소리를 부여한다. 쓸 수 없는 것을 쓰고, 신성하다는 말 외엔 달리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쓴다.

포세의 대표작 중 하나로 지난해 국내에 출간된 ‘멜랑콜리아’는 정신장애를 겪는 사람의 비논리와 망상, 강박, 집착, 불안 등을 글로 표현했다. 또 죽음을 앞둔 치매 노인의 정신적 혼란과 육체적 고통, 수치 등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이 소설 속 비드메라는 인물은 작가 포세의 분신이다. 비드메는 오슬로에 있는 미술관에서 ‘보르그외위섬’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보고 “신성하다는 말 외엔 달리 표현할 길 없는 한순간의 깨달음”을 경험한다. 그러면서 “이전에는 단 한 번도 글로 쓸 수 없었던 그 무엇, 신성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그 무엇”을 글로 쓰기로 한다.


‘샤이닝’은 지난해 발표된 포세의 최신작이다. 이 소설에서 포세가 무엇에 대해 쓰고 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죽음에 대해 쓰고 있다고 읽는 것은 하나의 유력한 독법이 될 수 있다. 죽음은 누구도 경험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세계, 그러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포세는 깊은 산속에 고립된 채 죽어가는 한 남자를 묘사하면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처한 인간, 죽음의 문턱을 넘어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려낸다.

소설의 주인공 ‘나’는 혼자 운전을 하다가 깊은 숲속에 갇혀 버린다. 방향을 바꿀 수도 없고 후진할 수도 없는 좁은 외길이다. 주요 도로나 민가에서 너무나 멀리 와버렸다. 앞으로 계속 갈 수도 없다. 게다가 날은 저물고 눈도 내리기 시작한다. 남자는 차를 벗어나 방향을 찾아보려 하지만 되려 숲속에서 길을 잃고 만다. 절망적으로 헤매면서 정신도 혼미해진다. 그런 시간 속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순백색의 존재,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아버지, 역시 정체가 모호한 검은 양복을 입은 신사 등을 만난다.

환상적 존재들을 향해 주인공은 “거기 누구 있나요” “당신은 누구시지요” 같은 질문을 던지지만 그 질문들에는 물음표가 없어 질문인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들이 말을 하기도 하지만 그 말 속에는 어떤 정보도 담겨 있지 않다. 어쩌면 자기와의 대화인지 모른다.

“…문득 나는 그 빛나는 존재가, 순백색의 반짝이는 존재가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을 본다, 그가 따라오라고 말하고, 우리는 그의 뒤를 따라간다, 아주 천천히, 한 발짝 또 한 발짝, 한 숨 또 한 숨, 검은 양복을 입은 얼굴 없는 남자, 나의 어머니, 나의 아버지, 그리고 나, 우리는 맨발로 무의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소설의 마지막에 배치된 이 문장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대한 하나의 잊을 수 없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원서 제목은 ‘Kvitleik’로 ‘순백색’을 의미한다. 순백색의 빛나는 존재는 주인공이 숲속에서 헤맬 때 가장 처음으로 만나는 대상으로 신을 묘사한 것처럼 보인다.

이 소설은 해외에서 “포세로 가는 입문서”라는 평을 받았다. 분문 길이가 80쪽이 채 안 되며, 문장도 그의 전작들과 비교하면 쉬운 편이다. 난해하다고 소문난 포세 문학에 접근하는 가장 만만한 통로가 될 수 있겠다. 1200쪽이 넘는 포세의 걸작 ‘7부작’의 압축판으로 여기지기도 한다.

한국어판에는 포세의 노벨문학상 수상 기념 연설문이 부록으로 수록됐다. 이 연설문에서 포세는 자신의 글쓰기에 대해 여러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나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쓰고 싶었다”고 분명히 말한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말로 할 수 없으며, 오직 글로 쓸 수 있다”면서.

이 연설문의 제목은 ‘침묵의 언어’다. 포세는 침묵 속에 깃든 언어, 혹은 침묵으로 말하는 언어를 듣고 쓰려고 한다. 그는 자신의 글쓰기를 “귀 기울여 듣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나는 침묵의 발화에 말글을 내주고 싶다”고도 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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