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회복을 위한 ‘사회적 정의’가 필요한 까닭

김남중 2024. 3. 14.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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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과 회복'은 미국 하버드대 정신의학과 교수인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트라우마 연구 3부작' 중 마지막 편이다.

허먼 교수는 50년에 걸쳐 성폭력, 범죄, 가정폭력, 학대 등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겪는 심리적 상처인 트라우마와 회복 문제를 연구해왔다.

'진실과 회복'은 피해자 회복에서 정의가 왜 필요한지 논하면서 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논의돼 온 피해자 회복 문제를 사회적으로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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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진실과 회복
주디스 루이스 허먼 지음, 김정아 옮김
북하우스, 312쪽, 1만9000원
지난 2월 광주에서 열린 세월호참사 10주기 전국시민행진 현장에 ‘진실’이라고 적힌 손팻말이 세워져 있다. 트라우마 연구의 거장 주디스 루이스 허먼은 ‘진실과 회복’에서 트라우마 치유와 피해자 회복에서 정의가 왜 중요한 문제가 되는지 다룬다. 뉴시스


‘진실과 회복’은 미국 하버드대 정신의학과 교수인 주디스 루이스 허먼의 ‘트라우마 연구 3부작’ 중 마지막 편이다. 허먼 교수는 50년에 걸쳐 성폭력, 범죄, 가정폭력, 학대 등으로 인한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겪는 심리적 상처인 트라우마와 회복 문제를 연구해왔다. 1981년 가족 내 성폭력 실상을 조명한 ‘근친 성폭력, 감춰진 진실’을 썼고, 1992년 트라우마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바꿔놓은 역작 ‘트라우마’를 출간했다.

‘진실과 회복’은 피해자 회복에서 정의가 왜 필요한지 논하면서 주로 개인적 차원에서 논의돼 온 피해자 회복 문제를 사회적으로 확장한다. 저자는 전작에서 생존자의 회복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했다. 안전한 현재 확보하기, 과거와 재회하기, 현재와 미래에 집중하면서 공동체와의 관계 확장하기. 그런데 돌아온 공동체에서 피해자가 환대받지 못하거나 트라우마를 야기했던 환경을 다시 경험해야 한다면 회복이 가능할까. 저자는 새 책에서 정의라는 또 하나의 회복 과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폭행하고 착취하는 가해자만 트라우마를 야기하는 게 아니다. 가학에 공모하거나 그 내용을 알고 싶지 않아 하거나 피해자를 비난하는 모든 방관적 대응 또는 무대응이 한층 더 심한 상처를 야기하는 경우가 많다.”

성폭력 피해를 입고 법정에서 가해자 처벌을 이끌어낸 백인 엘리트 여성 세라 슈퍼의 말은 처벌과 배상으로 왜 충분하지 않은지 알려준다. “나는 성폭력을 둘러싸고 있는 침묵을 느꼈다. 그 침묵이 어떻게 가해자를 보호하고 생존자를 고립시키는지를, 그리고 공동체가 강간 문화를 지지하는 무지하고 수동적인 방관자가 되는 것을 그 침묵이 어떻게 허락하는지를 나는 그때 깨닫게 되었다.”

이런 침묵, 이런 분위기 속에서 피해자는 법적으로 피해를 인정받았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위축되고 고립된다. 이는 또 다른 형태의 가해가 될 수 있다. 저자는 “생존자가 가장 바라는 형태의 조치는 윤리적 정당성을 입증받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생존자는 공동체가 생존자의 정당성을 명확하게 옹호하기를 바란다. 생존자는 자기가 수치스러워하지 않아도 되기를, 응당 수치스러워해야 할 가해자가 수치스러워하기를 바란다.”

생존자라는 말은 피해자를 인정하고 환대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저자는 “공동체가 생존자를 환대할 때” “사회가 가해와의 공모를 끊어낼 때”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라고 보면서 이를 ‘회복적 정의’ ‘치유적 정의’ ‘생존자 정의’ 등으로 부른다. 책은 “누군가가 피해자가 되었을 때 윤리 공동체가 그 사람을 지원하고 보살피는 것을 첫 번째 의무로 삼기를 요구하는 것이 바로 생존자 정의다” “공동체는 폭력과 착취가 마구 자행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시스템을 쇄신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등 생존자 정의를 위한 원칙들을 구성하고, 이를 실현하려는 다양한 운동들을 소개한다.

미국 미니애폴리스 공원에 2020년 세워진 ‘성폭행 생존자 기념비’가 한 사례다. 저자는 “기념비는 우리 사회가 누구를 예우하고 누구를 존중하는지를 말해주는, 오래가는 공개 선언”이라며 “이런 기념물은 생존자들의 권리를 공개적으로 옹호하고 남성 우월주의의 말해지지 않은 특권 의식들에 도전한다”고 설명했다.

생존자 회복을 위한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이 사회적·역사적 잘못들을 바로잡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주목돼야 한다. “생존자에게는 진실을 통과해 회복에 이르는 과정, 곧 윤리 공동체로부터 인정받고 옹호받고 사죄받고 보상받는 과정이 필요하다. 공동체가 이 과정을 완수했을 때 비로소 공동체와 생존자 사이의 망가진 관계가 치유되고, 신뢰가 회복되고, 더 나은 종류의 정의가 이뤄진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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