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워서 천장만 보던 남편을 움직이게 한 말 [롱디 결혼이야기]

최혜선 2024. 3. 14.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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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죽일 것 같던 일이 때로는 나를 살리기도 합니다

공부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18년간 가장 노릇을 하던 아내. 대학원 석사 시절에 결혼해서 박사, 강사를 거쳐 유럽 대학 교수가 되어 떠난 남편. 전생에 나라를 구해야 할 수 있다는 주말부부를 넘어 일 년에 서너 번 보는 롱디 부부의 이야기를 싣습니다. <기자말>

[최혜선 기자]

친구랑 카톡으로 내가 생각하는 성공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이런 말을 했다. 월수금 필라테스 하고, 화목 수영 다니면 운동 루틴이 완성되는 것이고 거기에 달목욕 끊어서 운동 후에 매일 목욕까지 하면 성공한 인생이라 생각한다고. 달목욕이라는 게 돈이 많이 드는 일도 아닌데 왜 그게 성공한 인생의 척도냐면 매일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생활이어야 매일 목욕탕에 갈 시간을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25년 교사 생활을 하신 후 내가 고등학교 3학년이던 해에 퇴직하셨다. 평생 저혈압이셨던 엄마는 아침마다 일어나는 게 힘들고 늘 피곤하다고 하셨다. 은퇴를 결정할 즈음에는 얼굴에 두드러기가 일어서 학교에 가기 힘들 정도로 얼굴 형태가 달라지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걸 보고 어린 마음에도 엄마 건강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걱정할 정도였는데 놀랍게도 학교를 그만두고 매일 목욕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몰라보게 건강해지셨다. 나이가 들어서도 젊을 때보다 더 건강해질 수 있구나를 그때 깨달았다. 그 얘길 하니 '이렇게 일하다가 내가 죽겠구나' 싶어 회사를 나온 친구가 말했다.

"역시! 일은, 직업이 무엇이 되었든 때려치워야 사는 거구나." 

내가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쪽에는 일을 그만두고야 잘 살아진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반대쪽에는 일이 사람 하나 살렸네 싶은 경우도 있다. 내 남편이 그랬다.

일이 없는 사람

체코 대학에 임용되기 전 그는 오랫동안 모교에서 강사 생활을 했다. 열심히 해도 길은 열리지 않고 점점 나이는 들고, 그가 지원한 자리에 훨씬 젊은 사람이 임용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는 일이 늘어갈수록 이미 늦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조바심도 났을 터다.

그런던 어느 날, 퀭한 눈으로 방문을 열고 나온 그가 말했다. "나 닷새째 잠을 한숨도 못 잤어." 겉으로 보기엔 어쩜 저렇게 태평한가 싶었는데 괜찮지 않았던 거였다. 당장 수면제의 힘을 빌어서라도 잠을 잘 수 있게 해주고 싶었는데 병원 예약을 하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는 것만도 5주가 걸렸다. 그만큼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는 뜻일 것이다.

그 5주 동안 하루하루가 얼마나 길었는지 모른다. 어떤 영상도 음악도 보고 들을 수 없었고 잠을 잘 수도 없어서 그는 오로지 천장을 보며 누워 있었다. 남편이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나도 같이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 커튼을 쳐 어둡게 만들어 놓은 방에 틀어박혀 누워만 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당신이 매일 회사에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라면 그렇게 누워만 있을 수 있겠어? 이를 악물고 일어나서 나가지 않을까? 그렇게 누워 있는 게 당신에게 정말 좋은 걸까? 밖에 나가서 걷기라도 해. 회사 가는 사람들처럼, 일이다 생각하고 매일."

다음날부터 남편은 낮에 동네 뒷산을 올랐다. 매일 등산을 하면서 그는 조금씩 잠을 자고 조금씩 회복되었다. 물론 약과 상담도 병행한 결과였지만. 몸 움직이는 것을 일이다 생각하고 걸었던 것이 그를 일으켰다. 그렇게 우울증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후 남편은 의욕적으로 자기 전공과 관계가 있는 대학들에 지원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임용이 되었다. 외국 대학에. 
 
 남편의 월세방
ⓒ 최혜선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감사한 일이었지만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게 문제였다. 체코는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시기가 되면 해도 일찍 지고 비도 자주 오고 한마디로 우울한 날씨라고 해서 또 한 번 남편이 예전처럼 울적해질까 봐 불안했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그 걱정이 마음 한구석에 늘 자리잡고 있었다.

처음 체코에 도착한 날 통화에서 남편은, 텅 빈 월세방에 83킬로그램의 짐과 함께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고, 비행기를 바꿔타고 17시간을 날아와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무척 우울하고 외로웠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데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도 놀란다는 옛말처럼 없는 듯 숨어있던 걱정이 순식간에 덩치를 키워 마음 속을 장악했다.

그 와중에 텅빈 월세방을 살 만한 공간으로 만드는 일, 배정받은 연구실을 쓰기 좋게 정리하는 일, 수업을 준비하는 일, 매 끼 식사를 차려먹는 일, 검도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보는 일들에 몰두하면서 도착 첫날의 우울함과 외로움은 점점 희석되어 가는 것이 보였다. 신경 써서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줄지어 있자 그것을 해결해야 했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허우적거릴 새도 없이 정신을 쏙 빼놓으려는 큰그림인가 싶기까지 했다.

나를 살리는 '일'

그렇게 첫 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을 한국에서 가족과 함께 보낸 후, 두 번째 학기를 위해 체코에 입국해야 할 때도 남편의 한숨 소리에 땅이 꺼질 것 같았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나면 잘 지낼 것을 믿었다. 체코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또 다시 그를 살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제 남편은 조금 더 바빠졌다. 어떤 날은 릴레이 회의가 있어서 잠깐 쉬는 시간에 짬을 내어 하루의 마지막 통화를 하기도 한다. 남편이 "나 이제 회의 들어가야 돼" 하며 서둘러 전화를 끊을 때면 격세지감에 씨익 웃음이 난다. 그건 그동안 내가 주로 하던 말이었는데...
 
 연구실 책상
ⓒ 최혜선
 
누군가는 어서 돈을 모아 일을 그만두는 것을 꿈꾼다. 그래서 하고 싶은 일만 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을 자유를 누리고 싶다고 한다. 하지만 어차피 일을 하면서 돈을 모아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단계로 가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렇기에 일을 해야만 하는 동안에는 기억하려고 한다. 일이란 것이 하기 싫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를 살리기도 한다는 것을.

일은 오히려 나를 다잡아 주는 것에 가깝다. 원하던 일을 하지 못해 마음이 무너졌던 일, 산을 걸으며 다시 일어섰던 경험, 학생들을 가르치고 상담하고 논문 쓰고 연구하는 일들이 가족을 떠나 혼자 생활하는 외로움을 조금은 잊게 해준다는 걸 경험해서다.

일을 그만두고서야 살만 해진 사람도, 일이 있어서 자신의 힘듦 속에 빠지지 않고 버텨온 사람도 모두 각자의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것일 테다. 인생의 진도가 다른 것일 뿐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니. 모두 건투를 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제 블로그나 브런치에 게재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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