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정치인이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까닭 [이슬기의 뉴스 비틀기]
[이슬기 기자]
▲ 지난 8일 오후 서울 종로 보신각앞에서 열린 ‘3.8세계 여성의날 정신계승 전국노동자대회’에 참석하는 민주노총 노동자들이 윤석열 정부의 반여성적, 반노동적 정책을 규탄하며, 성별임금격차 해소, 평등한 돌봄, 여성노동권 쟁취 등을 요구하며 본행사가 열리는 대학로까지 행진하고 있다. |
ⓒ 권우성 |
"여러분들, 집에서 밥해주고 나오셨습니까?"
지난 3월 8일 낮 12시 20분, 서울 보신각 앞. 3.8 여성 파업 집회가 열렸다. 한국 최초로 열린 '여성'이라는 이름의 파업이었다. 참석자 수는 700여 명 남짓, 많지 않았다. 그러나 성차별적인 승진·승급에 항의하고(금속노조 KEC지회), 노동자의 95%가 여성인 압도적 '여초' 일터로서, 해고 없는 소속기관 전원 전환을 위해 투쟁하고(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상담사), 존폐 기로에 놓인 공공 돌봄 기관에서 해고된 요양보호사 등 다양한 구성원들이 '여성'이라는 의제로 한데 모여 파업을 벌였다. 여자라는 이유로 일터에서 받는 부당한 대우와 오롯이 여성 몫인 가사 노동에 대해 이들은 대대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 3월 8일 '여성의 날'을 앞두고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가 6일(현지시간) 발표한 '유리천장 지수'(The glass-ceiling index)에서 한국은 조사 대상 29개국 중 29위로 집계돼 12년 연속 최하위를 기록했다. |
ⓒ 연합뉴스 |
전 세계적으로 여성의 노동은 평가 절하되지만, 한국은 더욱 심각하다. 이날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발표한 2016~2023 유리천장지수 그래프는 SNS상에서 공분 혹은 실소와 함께 공유됐다. 성별 임금격차, 여성 고용률 등 12개 항목으로 구성된 통계에서 한국은 29개국 중 꼴찌를 기록했다. 등락을 거듭하는 다른 국가와 달리 별 변동 없이 최저선을 지키는 한국의 그래프는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적나라한 성별 임금격차는 그래프 아닌 실사례로도 자주 접할 수 있다. 책 <직업을 때려치운 여자들>을 쓰며 만났던 사례 중 하나. 여성이 90%를 상회하는 방송 작가직에 남성이 들어오자 방송국에서 보였다는 태도다. "너는 남자니까 월급을 더 챙겨줘야겠다." 남자니까, 장차 한 가정의 가장이 될 사람으로서 가족 구성원들을 먹여 살릴 '가족임금'을 받아야 한다는 논리였다. 반대로 말하면, 고용주 입장에서는 노동자가 '여자'라는 것 자체가 돈을 덜 줘도 되는 유인이 됐다. 출산율이 0.6명대를 기록하고, 비혼 인구가 늘어가는 와중에도 여전히 집에서의 가장은 '남성'이기에 작동하는 프레임이다.
여기에 '백래시' 국면을 맞아 여자들의 임금 노동은 더욱 강한 저항을 맞는다. 여자가 성차별적 현실에 눈을 떴다는 것 자체가, 노동시장에서 탈락하는 요인이 된다. 게임·웹툰 등 콘텐츠 업계에 만연한 '페미' 색출, 고용노동부에 '여대 출신 이력서는 거른다'는 신고가 나흘 간 2800건 접수되는 현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고 했던 정부 하에서 여성들의 노동권은 보호받지 못한다. SNS에 '페미' 관련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회사에서 잘리거나 계약이 중지되지만, 이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은 느슨하기만 하다. 남녀고용평등법상 고용 성차별은 사업주에 500만 원 이하의 벌금을 물리는 데 그친다. 악화되는 구조적 성차별과 이를 바로 잡을 의지가 미약한 정부가 보여주는 환장의 콜라보(?)다.
▲ 뉴스타파의 총선 3부작 중 하나인 <성평등 국회>에 출연한 이혜훈 국민의힘 서울 중·성동을 후보가 발언하고 있다. |
ⓒ 뉴스타파 캡처 |
아직도 여성의 몫인 가사 노동은 여성의 임금 노동을 가로막는다. 3·8여성파업조직위원회가 여성노동자 693명을 대상으로 벌인 실태조사를 보면 답변자의 88%가 성별 불평등한 가사돌봄노동이 직장 활동(학업, 취업, 이직 등)에 영향을 미친다고 답변했다.
남성이 100만 원을 벌 때, 여성이 69만 원을 버는 성별임금격차에 따라 보통 남편이 아내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 젊은 부부들 가운데 '둘 중 누가 육아휴직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이러한 현실적인 고려를 반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렇게 여성에게만 가중된 임금 노동 경험의 감소는, 202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클라우디아 골딘 교수의 진단처럼 여성의 승진 기회나 미래 소득을 낮춘다. 이는 가족 내에서 여성의 협상력이 줄어드는 악순환으로도 이어진다. (물론, 이러한 경제적인 고려를 떠나서도 한국에서는 여성이 더 많은 가사노동을 하는 게 현실이지만.)
누구나가 '아내'를 원하지만, 일자리에 돌봄의 성격이 짙으면 사회적으로 '후려치기 좋은 요소'가 된다. 이쯤 하면 돌봄에 대한 혐오에 가깝다. 돌봄이란 국내총생산(GDP)에도 계상되지 않는 무급노동이자, 여성의 일인 탓이다. 대표적인 저임금 여초 일자리가 가사노동자, 요양보호사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제가 한 번씩 사람들에게 '저의 직업은 요양보호사입니다' 라고 하면, 눈빛이 변하는 게 느껴집니다. 거리를 두거나 대하는 태도가 바뀌는 것을 느낀 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감정들로 스트레스 수치가 올라가기도 합니다." 서울시사회서비스원에서 하루아침에 해고돼 민간 센터의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김춘심씨의 말이다.
▲ 지난 4일 서울 마포구 강북노동자복지관에서 열린 '여성노동실태조사 보고회'에서 김춘심(오른쪽에서 두 번째) 요양보호사가 발언하고 있다. |
ⓒ 이슬기 |
이 모든 문제의 기저에는, 알다시피 구조적 성차별이 도사리고 있다. 성평등을 확립해 '돌봄은 여성의 몫'이라는 전제부터 바꿔야 한다. 성별 임금격차, 성별 직종분리는 모두의 일이되 유독 여성의 발목만 잡는 돌봄에서 왔다.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성평등한 돌봄을 위해서는 성평등한 사회가 선행돼야 한다.
돌봄의 공공성 강화도 필수적이다. 돌봄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도, 돌봄 서비스를 이용하는 여성들에게도 꼭 필요한 조처다. 요양보호사인 춘심씨가 시급이 아닌 월급을 받고, 아프면 병가도 쓸 수 있는 공적 안전망에 속해 있어야 노동권과 함께 돌봄의 질이 보장된다.
'신성한 돌봄'이라는 말은, 돌보는 여성들의 희생을 당연시하고 그들의 임금노동마저 후려치는 말로 기능해 왔다. 그러나 외신 특파원들이 전하는 한국의 풍경인 '출산 파업'에서처럼, 한국 여성들은 일종의 '돌봄 파업'을 이미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시작했다. 아예 결혼을 마다해 가부장제로의 편입을 거부하겠다는 비혼 인구의 증가가 여기에 해당되며, 3.8여성의날에 벌인 한국 최초의 여성 파업은 여성이라면 너도 알고 나도 아는 명제를 확인하는 축제의 장이었다.
'선한 행위를 벌하면 결국 선한 행위는 줄어든다'. 낸시 폴브레 미국 매사추세츠대 명예교수는 책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에 이렇게 썼다. 새로울 것 없는 일반적 명제이지만, 여기에 '돌봄'을 대입하면 다르게 보인다. 이어 그는 말한다. '여성에게 이타적 행동을 강제할 것이 아니라면 타인에 대한 돌봄에 가치를 부여하고 보상하는 새로운 형태의 집단적 헌신을 강제할 제도가 필요하다.' 그것이 돌봄의 공공성 강화이고, 성평등 확립임은 누구나 다 안다. 현 정부만 '모르쇠' 한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낸시 폴브레 지음, 윤자영 옮김, 2023,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에디토리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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