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은 평화와 타협의 길에서만 이루어져야
[박도 기자]
▲ <나의 20세기> 표지 |
ⓒ 도서출판 학민사 |
영국기행에서 느낀 바, 그들은 "경험은 최상의 스승이다(Experience is the best teacher.)"고 하여, 선인들의 체험에서 우러난 기록들을 대단히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이른바 선진국이라는 서구의 여러 나라들은 역사를 아끼고, 사랑하며, 올곧게 기록하고 있었다.
역사학자 김성식은 <내가 본 서양>에서 "영국 사람은 역사를 아끼며, 프랑스 사람은 역사를 감상하고, 미국 사람은 역사를 쌓아간다"고 했다. 그들은 비록 사소한 것일지라도 거기에 역사가 있으면 이를 아끼고, 그대로 보존하며 원형을 손상치 않고자 심지어는 건물의 먼지 닦는 것조차도 주저한다고 한다. 그들은 설사 조상의 어둡고 부끄러운 역사일지라도 있는 그대로 보존하면서 후손들에게 바른 역사를 일깨워 주고 있었다.
이웃 중국도 오랜 굴종의 역사에서 해방된 뒤, 온 나라 곳곳의 역사 현장에다 '물망국치(勿忘國恥, 나라의 치욕을 잊지 말자)' '전사불망후사지사(前事不忘後事之師, 지난 일을 잊지 말고 후세의 교훈으로 삼자)'라는 글을 돌에 새겨 놓고 지난 치욕의 역사를 무언중에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역사 현장에서 만난 한 역사학자(연변대 박창욱)는 "과거를 잊는 것은 반역자다"라는 극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는 역사를 모르는 이는 하등동물처럼 거듭 시행착오를 하거나 역사의 시곗바늘을 되돌려 놓기 때문일 것이다. 더욱이 나라의 지도자가 역사를 모르는 것은 나라와 겨레를 나락에 떨어뜨릴 우(愚)를 저지르기 마련이다.
독서 삼매경에 빠지다
모처럼 독서 삼매경에 빠졌다. 학민사 발간 정하룡의 회고록 <나의 20세기>를 읽는 동안 나의 지나온 삶, 그리고 저승에 계신 아버지의 말씀들이 새록새록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밖에도 독서하는 내내 내가 미처 몰랐던 역사적 사실에 감읍했다. 내가 어렸을 때 체험한 6.25전쟁의 이미지들이 낱낱이 재생됨은 물론, 4차에 걸쳐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을 드나들면서 수집했던 전쟁의 상흔 이미지들이 한 컷 한 컷 떠오르기도 했다.
이 책은 통일운동가 정하룡 선생의 회고록이다. 저자는 1933년에 태어나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살았다. 이제 인생의 막장에서 지난날을 관조하면서 후세인들에게 유언하는 심정으로 당신의 지난 체험들을 진솔하게 토로한 고백록이다. 이 회고록은, 미래사의 기본이 되는 과거사의 기록이다. 그리하여 자식 세대, 손자 세대, 곧 지금의 한국을 짊어지고 있는 청장년들에게 남기는 '기억의 전달'이라고 말하고 있다.
▲ 1950. 9. 29. 전주, 주민들이 대량 학살 암매장된 현장에서 시신을 파내고 있다. |
ⓒ NARA |
우리 세대는 전쟁 체험자들입니다. 내 주변에서도 많은 사람이 직접 전쟁터에서 죽이고 죽었습니다. 그리고 적들은 같은 동족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부서진 집이나 시가지, 황폐한 논밭,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과 영원한 이별이 봉착했을 때, 인간은 싫어도 인간성 자체에 회의감을 품게 됩니다. 이겨도 져도 남은 사람들은 절망과 허무의 늪에 빠지게 마련입니다.
남북한은 서로를 '괴뢰'라고 욕설을 퍼붓지만, (사실) 남북한은 각자 서로의 종주국 괴뢰였습니다. 문제는 '괴뢰'들이 벌인 전쟁의 참상입니다. 무수한 죽음과 그 가족들의 참혹한 절망과 허무입니다. 밀턴의 말처럼, 우리는 이성을 잃고 악마의 뜻에 놀아났습니다. - 본문 74~75쪽에서
나는 이 대목을 반복해 읽으면서 현역시절 전방 적 예상 침투로 초소에서 밤새 잠복근무를 할 때, 피아간 대남 대북 방송의 말들이 머리 위로 지나는 장면이 떠올랐다.
20세기를 '전쟁의 세기'라고 부릅니다, 무기 체계가 대량 살상의 방향으로 개발되고, 전쟁의 잔학성을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중에서도 국가 또는 민족 안에서의 내전은 그 비극이 최악입니다. 같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고, 한 언어를 사용하는 단일 민족 내에서의 절대 불관용 전쟁은 더욱 참혹하였습니다. '근친 증오심' 같은 것이 작동하면서 마을 전체가 도륙당하는 일들이 각지에서 일어났습니다. 남녀노소 불문한 마을 전체의 학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 본문 99쪽
▲ 1950. 10. 10. 함흥, 학살된 시신을 늘어놓은 곳에서 가족의 시신을 찾고 있는 유가족들. |
ⓒ NARA |
6.25전쟁 중,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한국군이 포함된 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서로 한 번씩 군사통일을 이룰 뻔했습니다. 서로의 수도 서울과 평양을 뺏고 빼앗기면서 3개월 정도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한반도를 번갈아 가며 군사적으로 통치했습니다.
이러는 과정에서 친공 분자들과 반공 분자들이 서로 노출되고, 그때마다 점령군 측은 반대쪽 사람들을 처형했습니다. 특히 퇴각할 때는 급한 나머지 아무 절차도 없이 '적'을 식별할 시간도 없이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까지 무더기로 일시에 학살하는 광경이 도처에서 일어났습니다. 가해자는 인민군이가도 했고, 남한 군경이기도 했습니다. - 분문 102쪽
이 두 대목을 읽으면서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찾은 사진들이 떠올랐다. 이들 학살 사진에는 가해자에 대한 기록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필자를 돕던 6.25전쟁 당시 참상을 목격한 한 재미동포는 당시 학살 가해자는 남북 모두가 자유로울 수 없다는 증언을 들려주었다.
▲ 6.15 공동선언 후 남북 정상이 손을 치켜들다 |
ⓒ 김대중 이희호 기념사업회 |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다"
나는 지금도, 우리나라가 가야 할 길은 중도주의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 길만이 남북 간 통로입니다. 그러나 후진 사회일수록 진영논리에 대한 광신이 심했습니다. 한쪽은 이성이고 다른 쪽은 억지이고,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라는 이분법을 따르지 않으면 바로 기회주의로 몰리고, 적의 하수인으로 만들어졌던 것이 우리나라 근현대사였습니다. 통일은 평화와 타협의 길에서만 이루어질 것입니다. - 218쪽
그래서 저자는 유럽유학 중, 그 길을 찾고자 금단의 선을 넘나들다 사형수에 이르기도 했다.
아내를 먼저 보내고, 지금 나는 고창의 아름답고 한적한 실버타운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 내가 석방될 때 중앙정보부 사람으로부터 삼비(三秘)의 원숭이가 되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지금 나는 저절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멀어가고, 말도 어눌합니다. 그러나 정신만은 멀쩡합니다. 꺼지지 않는 희망의 광채가 남이 있습니다. 우리는 역사라는 바둑판에서 하나의 사석(捨石)이었지만 아들 세대, 손자 세대가 기필코 이 사석을 이용하여 민족 대통합이라는 대마를 낚아낼 것이라는 그런 희망 말입니다. - 40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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