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정권이 찬양한 '이승만 정신'... 김대중은 한마디로 정리했다 [김종성의 '히, 스토리']

김종성 2024. 3. 14.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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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히,스토리] 3·15 부정선거, 민심 이반은 예견돼 있었다

[김종성 기자]

 윤석열 대통령(왼쪽)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해 5월 21일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내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를 공동 참배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정권은 김대중 대통령을 존경하는 척한다. 자신들이 가장 중시하는 한일관계에서 김대중·오부치 공동선언을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1965년 한일협정을 강행한 박정희를 모델로 삼는 듯하다.

또 그처럼 김대중을 앞세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이승만을 열렬히 미화한다. 제2의 이기붕들이 환생하기라도 한 것처럼, 윤석열 정부에는 이승만의 신하들이 가득하다.

대일관계에서는 겉으로나마 김대중을, 대미관계 및 국내 정치에서는 열렬히 이승만을 띄우는 이 모습은 김대중을 불쾌하게 만들고도 남을 만하다. 김대중이 이승만을 얼마나 낮게 평가했는지를 고려하면, 윤석열 정권이 띄우는 김대중-이승만 조합은 김대중의 뜻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일이다.

"춘삼월 15일 조기 선거 웬말인가"

1960년 4·19 혁명 이전에는 국회의원 총선과 대통령 선거를 5월이나 그 직후에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이 관행대로라면 1960년의 시민혁명은 4월이 아닌 5월 이후에 일어났어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4월에 일어난 것은 이승만 정권이 합리적 사유 없이 선거일을 앞당겨 여론의 역풍을 초래한 것에 기인한다.

1948년의 제1대 총선은 정부수립 전인 그해 5월 10일에 있었다. 한국전쟁(6·25전쟁) 직전의 제2대 총선은 1950년 5월 30일에 있었다. 휴전 이듬해의 제3대 총선은 1954년 5월 20일에 있었다. 제4대 총선은 1958년 5월 2일에 있었다. 1948년 5·10총선이 '5월 선거'의 관행을 낳았음을 알 수 있다.

이 관행은 대통령 선거에도 영향을 줬다. 국회를 구성한 뒤에 정부를 수립하다 보니, 국회 간선제로 치러진 1948년 대선은 그해 7월 20일에 치러졌다.

1952년 대선은 그해 8월 5일에 열렸다. 임기 4년인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7월 24일에 취임식을 가졌으므로 1952년 7월 24일 이전에 대선을 실시해야 했으나, 이승만 정권은 비상계엄하인 1952년 6월 23일 '정부수립일인 8월 15일이 임기 만료일'이라는 결의를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렇게 해서 시간을 번 이후인 7월 4일에 이른바 발췌개헌으로 불리는 탈법적 헌법 개정을 통해 간선제가 아닌 직선제로 바꿔 대선을 치렀다. 국회 간선으로는 당선이 불가능하게 보여 전쟁 와중에 직선제 개헌을 강행했던 것이다.

이같은 1948년·1952년 대선과 더불어 5월 15일에 열린 1956년 대선을 종합하면, 당시의 한국인들에게는 5월이나 그 직후의 선거가 당연시됐다. 그래서 1960년 3·15 선거는 그 시절 사람들에게 상당히 뜻밖의 일이었다. <김대중 자서전> 제1권은 이를 두고 "5월 선거를 깬 파격이었다"라며 "뒤에는 물론 정략이 숨어 있었다"라고 말한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대통령후보 선출을 둘러싸고 파벌 싸움을 치열하게 벌이고 있었다. 개혁적인 신파와 보수적인 구파 간의 경쟁은 심각한 후유증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에 여당은 야당의 파벌 싸움을 부추겨 전선을 분산시키고 양대 세력이 뭉칠 시간을 주지 않으려 선거 일정을 당긴 것이었다. 야당이 선거에서 힘을 쓰지 못하도록 동력을 앗아버리겠다는 계산이었다."

민주당이 내분을 수습하기 전에 대선을 얼른 치르자는 발상에서 내놓은 '3·15 선거' 카드는 결국 자충수가 됐다. 국민들은 5월 이후가 아닌 3월에 선거를 하는 것은 뭔가 속셈이 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였다. 이는 선거일 훨씬 전부터 이승만에 대한 원성을 들끓게 만드는 요인이 됐다.

당시의 민주당은 어려움을 많이 겪고 있었다. 1956년 대선 열흘 전인 5월 5일에는 대통령 후보인 해공 신익희가 급서했고, 1960년 대선 한 달 전인 2월 15일에는 대통령후보 조병옥이 미국에서 급서했다. 이 때문에 대통령 후보 없이 부통령 후보인 장면 한 사람만 내보내게 됐다. 여기다가 구파와 신파의 대립까지 심했다. 위기를 수습할 당내 역량이 이 때문에 더욱 결집되기 힘들었다.

이렇게 야당이 어지러운 상황에서 여당은 선거일마저 '파격'으로 정해놓고 부정선거를 획책했다. 그래서 민심은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여당을 견제할 야당이 든든했다면 모르겠지만, 야당마저 위태위태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1960년 3월 15일 실시된 제4대 대통령선거 선거벽보. 이승만 대통령 후보와 이기붕 부통령 후보 선거벽보. 3.15 부정선거로 4.19 혁명을 유발해 무효 선거가 됐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 연합뉴스
 
이 같은 분위기는 반야월이 작사하고 가수 박재홍이 부른 '유정천리'를 국민들이 개사해서 부른 데서도 느낄 수 있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 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 못 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라는 가사를 담은 이 노래는 1960년 2월 22일자 <동아일보> 3면 좌하단에 따르면 이렇게 개사돼서 퍼져나갔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온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15일 조기 선거 웬말인가/ 천리만리 타국 땅에 박사 죽음 웬말인가 / 서룸 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네."

10대 학생들도 노래를 따라 불렀다. 이 때문에 학교 교사들이 가장 당황해했다. 위 <동아일보> 기사에는 경상북도 전역의 중고교 교사들이 학생들의 호주머니를 검사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행여 상부로부터 책임 추궁을 당할까" 교사들이 가사 쪽지를 찾아내는 데 혈안이 돼 있다고 기사는 전했다.

"춘삼월 15일 조기 선거 웬말인가"라는 가사에서도 나타나듯이 선거일을 3월 15일로 정한 것 자체가 자충수였다. 이는 뭔가 나쁜 음모가 있으리라는 인상을 심어줘서, 선거일 훨씬 전부터 민심 이반을 가속화시켰다.

"철학이 없었다" 이승만에 대한 김대중의 평
 
 2022년 2월 23일 당시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전남 신안군 하의도 김대중 대통령 생가를 방문해 참배하는 모습.
ⓒ 공동취재사진
 
1987년부터 2012년까지의 대선은 항상 12월에 실시됐다. 1987년 6월항쟁으로 헌법을 바꾼 뒤에 선거를 열다 보니 12월에 대선을 치르는 관행이 형성됐다. 이 관행은 촛불혁명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2017년 3월 10일 탄핵되고 그해 5월 9일에 대선이 치러지기 전까지 유지됐다.

1960년 당시의 국민들은 5·10 총선의 기억에 매여 있었다. 그래서 선거는 5월이나 그 후에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인식했다. 이승만은 합리적 사유 없이 두 달 앞으로 당겼다가 여론의 역풍을 초래했다. 이것이 정권 붕괴의 한 가지 원인이 됐다.

김대중은 3월 15일을 선거일로 정한 것을 포함해 이승만 정권이 저지른 전반적 부조리들을 열거한 뒤 "고집은 있었지만 철학이 없었다"라는 말로 이승만을 낮게 평가했다. 윤석열 정권은 이승만의 정신과 사상을 기초로 대한민국을 뒤바꾸려 하지만, 김대중은 "철학이 없었다"라고 이승만을 평했다.

윤석열 정권이 생각하는 이승만의 정신과 이념은 김대중의 생각에 따르면 이승만의 고집에 불과한 것이다. 윤석열 정권이 고집밖에 없었던 이승만을 자신과 병렬시키는 것을 김대중이 좋게 생각할 리는 없을 것이다.

철학이 없는 인물이 대통령 자리에 앉았기에, 훌륭한 인재들이 그 옆에 모일 리가 없었다. 김대중은 "신념이 흔들리는 지도자 주변에는 간신배가 들끓기 마련"이라며 "그것은 뜨거운 권력을 향해 생명을 걸고 달라붙는 나방들의 어지러운 곡예에 다름 아니었다"라며 이승만 정권의 난맥상에 대해 자서전에 썼다.

이승만을 비호하는 사람들은 이기붕 같은 간신배들이 이승만의 눈과 귀를 가렸기 때문에 이승만이 실패했다고 억지스럽게 변호한다. 김대중은 그런 간신배들이 들끓은 원인은 이승만 자신에게 있다고 봤다. 나라를 어떻게 이끌겠다는 철학이 없었기에 신념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이기붕 같은 간신배들이 들끓게 됐다고 인식했다.

생전의 이승만은 제대로 된 충신을 옆에 두지 못했다. 그 옆에는 이승만이 가진 이권에 눈독을 들이는 간신배들만 들끓었다. 생전에 충신을 곁에 두지 못했던 임금이 죽은 뒤에 충신을 옆에 두는 것은 더욱 힘들다. 생전에 간신배들만 들끓었다면, 죽은 뒤에도 이권을 노리는 간신배들이 들끓기 마련이다. 이승만을 열렬히 미화하고 찬양하는 윤석열 정권이 이승만의 충신이 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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