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가 노후야?" 50대 남편의 놀라운 대답

우현주 2024. 3. 14.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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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즐길 여유가 없는 가장에게 로또를 선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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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현주 기자]

요즘처럼 돈 생각이 간절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물가는 무섭게 오르고 특히 과일값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 부모님은 전화할 때마다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불편하다 하시니 이젠 전화가 부담스러울 정도다. 자식도 대학만 보내면 끝인 줄 알았는데 돈 들어갈 일은 끝없이 생긴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게 다 오르는데 남편 월급만 안 오르는 것 같다. 이럴 때 어디에서 돈이라도 왕창 떨어지면 얼마나 좋을까. 드라마처럼 부자 친척이 유산이라도 남겨 주면 좋겠지만 그런 일이 일어날 리는 만무하니, 어떻게 할까.
 
 남편은 로또가 당첨된다면 뭘 할까? 남편한테 한 번 물어봤다.
ⓒ elements.envato
 
서민들이 돈벼락을 맞볼 수 있는 유일한 길, 자꾸 로또에 눈길이 간다. 로또에 걸리면 무얼 할까? 로또를 사지 않더라도 당첨금으로 무얼 할지 상상하는 건 언제나 즐겁다.

'일단 기부도 좀 하고, 부모님 병원비를 좀 떼어놓고, 아들 학비랑 집 마련을 위해서도 따로 좀 둬야 하겠지. 이참에 세탁기도 새로 나왔다는 건조기 일체형으로 바꾸고 싶다. 가족이랑 같이 해외여행도 가야지. 그리고 남은 돈은 노후를 위해 투자해야겠다. 부동산 투자가 좋을까, 우량주를 사는 게 나을까, 아니면 그냥 은행에 두고 죽을 때까지 조금씩 꺼내 쓰는 건 어떨까?'

어느새 나도 모르게 꽤 몰두한다. 남편은 로또가 당첨된다면 뭘 할까? 남편한테 한 번 물어봤다.

"당신은 로또 1등에 당첨되면 뭐 할 거야?"
"난 생각할 필요도 없어. 무조건 부동산이야. 건물 살 거야."

남편은 1초도 망설이지도 않고 대답했다. 로또 당첨금을 몽땅 건물 사는 데 쓰겠다는 남편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했다. 남편은 원래가 보수적인 성격에 조심스러운 성향이라 평생 뭔가 과감한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노후 준비해야 한다는 말을 한참 때인 30대부터 하더니 이제 정말 퇴직이 카운트다운에 들어간 50대가 되니 아예 노래를 부른다. 한 푼 한 푼 나가는 돈에 더욱 민감해진 건 물론이었다. 회사만 다녔지 이렇다 할 자격증을 가지고 있거나 사업할 성격도 못 되는 남편의 꿈은 무려 꼬마 빌딩 건물주였다.

몇 년 전까지는 그랬다. 최근에는 부동산 시장 정체로 가격이 떨어지면서 수익형 부동산으로 눈을 돌리긴 했지만, 오매불망 노후를 위한 대책으로 부동산만을 바라보는 건 변함없었다. 내 눈엔 여유도 안 되는데 그렇게 큰 꿈을 꾸는 게 이해가 안 됐다. 그렇지만 남편은 부동산은 원래 그렇게 투자하는 거라고 했다.

아끼는 게 나쁠 건 없었다. 나도 편히 앉아 월세 받고 사는 건 좋았다. 하지만 남편은 월급을 가져다주기만 할 뿐 거기서 돈을 불리는 실제적인 역할은 내 몫이었다. 평생을 근검절약 모드로 사려니 어느 순간부터 지치기 시작했다. 남편의 초조한 심정은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이 '노후 준비'란 건 도대체 언제 끝나나 싶었다.

우리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남편이 말하는 노후는 손에 닿지 않는 저 너머에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번은 남편에게 당신이 생각하는 그 '노후'란 도대체 몇 살 정도인지 물어봤다. 그랬더니 놀라운 대답이 돌아왔다. 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70세, 80세 정도?'라는 거였다. 아마 남편 본인도 정확한 노후의 시작점에 대해 생각해 본 건 처음일 터였다.

사실 '노후'란 막연한 개념일 뿐 정확히 언제부터라고 정의할 수 없는 시기이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노후라는 말 대신 좀 더 명확하게 경계를 그을 수 있는 '은퇴(retirement) 이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한국의 노후라는 막연한 개념은 평생 준비만 해야 하는 불안한 상태를 만들었다. 비유하자면 평생 결승선을 향해 달려가기만 할 뿐 정작 그 결승선은 자꾸 뒤로 후퇴하는 느낌이었다.

남편의 일생은 바로 그 '노후'를 준비하는 데 보낸 거나 다름없었다. 언제나 '만일'을 대비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항상 긴장 상태에 살아야 했다. 언제부턴가는 남편을 보고 있으면 이 사람은 노후 준비를 하다못해 인생을 즐긴다는 생각 자체가 죄스럽게 느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연휴에 여행이라도 가려면 한참을 설득해야 했다. 여행은커녕 도서관만 데려가도 재테크 책만 빌렸다. 재미있어서 빌린다기보다는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골랐으리. 내가 독서 모임을 위해 빌린 소설책을 보면 "당신은 언제나 재미있는 책만 읽네" 하고 부러운 목소리로 말하곤 했다. 쉬기 위해 소설책 한 권도 읽지 못할 정도로 마음에 여유가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돈벼락이 떨어진다는 상상의 세계에서조차 가족은커녕 자기를 위해 한 푼도 쓸 생각을 못하고 몽땅 부동산에 투자하겠다고 하는 거였다. 미래의 자신이 편히 살기 위해 현재의 남편은 쉬지도 못하고 일하는 판국이었다. 남편은 딱한 사람이었다.

행복이란 게 별건가? 우리는 남편이 말하는 그 '노후'를 결코 맞지 못할 수도 있다. 내일이라도 사고를 당해 죽는다면, 아니면 70세 전에 병들어 죽는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니 미래에 대한 대비만큼 오늘을 즐겁게 사는 것도 중요하다.

물론 흥청망청 쓰자는 건 아니다. 내일을 위해 절약하고 투자해서 자산이 늘어나는 걸 보는 건 분명히 보람 있는 일이다. 하지만 가끔 그렇게 달려가느라 지칠 때 잠시 숨 돌릴 줄 아는 여유도 꼭 필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로또는 그럴 때 꿈을 꾸기 위한 꿈나라행 티켓이다. 로또를 사서 결과를 발표하기까지 잠시나마 꿈꿀 수 있는 시간을 원하기에 사람들은 그 티켓을 사는 것일 테다. 나는 남편한테 그런 여유를 일깨워 주고 싶다. 화이트데이라는 핑계를 들어 남편에게 로또를 한 장 선물할까 보다.

돈 낭비를 싫어하는 사람이니 많이는 말고 딱 1장만 사야겠다. 그 로또 1장으로 남편이 잠시나마 현실의 부담을 잊고 마음껏 꿈꿀 수 있는 여유를 기억해 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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