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백을 초석으로”…‘의료개혁’ 원년 가능한가
“올해를 의료개혁의 원년으로 삼고 흔들림 없이 완수하겠다.”
지난달 6일 정부가 의과대학 입학 정원 규모를 확정 발표하면서 내건 포부다. 한 달가량 지난 지금 전공의 집단 사직으로 대형병원은 마비되고, 의대 교수들은 사직을 결의했으며, 환자들의 피해는 날로 커지고 있다. 보건의료 전문가들은 현 시점을 여러 의견을 취합하고 합의를 이끌어내 개혁에 시동을 걸 수 있는 ‘적기’라고 봤다.
“공통 문제의식에서 시작”
14일 정부와 의료계는 ‘강대강’ 대치를 이어간다. 대화는 사실상 실종된 상태다. 양측 모두 논의 여지를 열어놓고 있다면서도 정부는 관련 직역들을 아우르는 대화에 소극적이다. 의료계 역시 의대 2000명 증원 철회를 선결 조건으로 내세우고 있어 갈등 국면이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전공의가 떠난 의료현장을 지키던 교수들도 버티지 못하고 집단 사직을 결의하며 양측의 ‘샅바 싸움’은 분수령을 맞았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갈등의 해소는 ‘공통된 문제의식’에 대한 대화에서 시작된다고 입을 모았다. 이어 시급히 개선이 필요한 의료개혁 과제로 △의료전달체계 확립 △의료인력 간 업무 조정과 유연화 △수가체계 개편을 통한 필수의료 집중 투자 △지역·공공의료 강화 △전문의 중심 진료환경 조성 등을 꼽았다.
정형선 연세대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만성질환에 대한 주치의 제도를 도입해 상급종합병원은 중증질환과 응급환자 중심으로 전환하고, 경증환자의 외래를 차단해야 한다”며 “병동 단위가 아닌 병원 전체로 간호간병통합서비스를 확대하고, 의료인력 간 업무 조정을 통해 진료보조(PA) 및 홈케어에서 간호사의 역할을 늘려야 한다”고 제언했다. 그러면서 “정부와 의료계가 똑같이 현 의료제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만큼 이번 사태를 계기로 의료개혁의 논의가 본격화된다면 올해가 의료개혁의 원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석준 고려대 보건대학원장은 △병상 등 의료자원 조절 △지역 중증·응급의료 분야 집중 투자 △의료서비스 지불보상제도 혁신 등이 순차적·병렬적으로 이뤄져야 의료개혁이 가능하다고 짚었다. 특히 현행 건강보험 보상체계에서 93% 정도를 차지하는 ‘행위별 수가제’ 대신 노력에 대해 정당하게 보상하는 ‘가치 기반 지불제’ 등으로 지불제도가 개편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행위별 수가체계는 의료서비스를 많이 제공할수록 유리해 소아청소년과, 산부인과 등 수요가 줄어드는 필수과 의사들의 이탈을 촉진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또 인구가 많은 대도시로 의사가 몰리고, 과잉 진료나 소위 ‘3분 진료’라는 공장식 진료가 성행하는 데 한몫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윤 원장은 “우리나라 보수 지불제도의 93%가 행위별 수가제에 매몰돼 있는데, 다른 어느 나라와 비교해도 과도하게 쏠려 건강보험 재정 낭비가 심하다”면서 “소아청소년과나 산부인과 등 필수과는 환자가 없어도 병원이 운영될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행위별 수가체계 안에서 제대로 된 보상이 이뤄지지 않아 힘들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여전히 중증·응급외상 분야의 투자는 부족한 상태”라며 “적극적인 투자로 의료 이용의 균형을 맞추면서 순차적인 의료시스템 개혁을 해나가야 한다”고 했다.
“공공의료, 개혁 성패 좌우”
조승연 인천광역시의료원장(전국지방의료원연합회 회장)은 상급종합병원(3차병원), 종합병원·전문병원·공공병원(2차병원), 동네 병의원(1차병원)으로 나뉜 의료전달체계를 명확히 조정·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피력했다. 특히 환자들이 서울로 몰려 치료를 받는 원정 진료가 없도록 지역 거점병원을 육성하고, 공공의료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조 원장은 “현 위기를 상급종합병원에 쏠린 의료전달체계를 개편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며 “지역의료 위기가 이 문제의 근본적 출발점이라고 하면 지역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전국의 공공병원을 국립암센터나 국민건강보험 일산병원 수준으로 키우면 된다”고 말했다. 이어 “의사를 늘려야 하는 것은 맞지만 모든 이슈가 의대 증원에 매몰돼 있어 안타깝다”며 “정부가 의료 정책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설계해 실행한다면 건강보험 제도를 도입한 이래로 가장 뜻 깊은 의료개혁 원년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시민사회단체들도 정부가 공공의료 강화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경득 공공운수노조 의료연대본부장은 “앞으로 공공병원을 늘리고 공공의료를 제공하는 인력을 키워야 하는데 이를 위한 전제조건이 의료인력 확충”이라며 “의료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커진 상황에서 공공의료를 얼마나 강화할 수 있을지가 개혁 성패를 좌우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정부는 전공의 이탈로 빚어진 의료공백을 메우면서 이를 의료개혁의 발판으로 삼을 방침이다. 구체적으로 상급종합병원은 중증·응급환자, 종합병원은 중등증(중증과 경증의 중간)환자, 동네 병의원은 경증환자 대응과 진료에 각각 집중하도록 할 계획이다. 또 상급종합병원을 이용하려면 2차 의료기관의 의뢰서를 갖추도록 하는 등의 방안도 검토 중이다. 상급종합병원으로부터 환자를 받아서 치료할 수 있는 특수·고난도 전문병원도 특화한다.
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은 “의료기관과 환자 모두의 이익이 커지도록 인센티브 구조를 개편하겠다”며 “현 4단계 의료기관 종별 가산 수가제도 역시 필수의료 전달체계가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기준과 체계에 대한 전면 개편을 검토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우리 의료의 문제를 해결하고 수준을 높이면서 미래에 대응할 수 있는 의료체계를 반드시 만들어 가겠다”고 덧붙였다.
신대현 기자 sdh3698@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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