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스탈린 29년 통치' 넘어선다…"한·러관계 최악? 달라질 수도" [푸틴 집권 5기]
" “주권이 위협 받는다면 러시아는 핵무기를 사용할 준비가 돼 있다.” " 블라디미르 푸틴(72) 러시아 대통령이 13일(현지시간) 공개된 국영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15~17일 사흘간 치러지는 러시아 대선 직전 나온 발언이다. 투표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지만, 누구도 푸틴의 재집권이란 결과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 미군을 배치하면 개입으로 간주할 것”, “무기는 사용하기 위해 존재한다”란 푸틴의 서슬퍼런 경고에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2000년 첫 당선 이후 대통령 네 차례, 총리를 한 차례 역임한 푸틴은 이번 대선을 통해 5기 통치 시대를 열며 2030년까지 30년간 집권할 수 있게 된다. 옛 소련 시절 이오시프 스탈린의 29년 독재(1924~53)보다도 통치 기간이 길다. 러시아는 2020년 헌법을 개정해 푸틴이 2036년까지 집권할 수 있는 길을 열어뒀다. 푸틴은 84세까지 권좌에 머무를 수도 있다. 그래서 서방 언론들은 푸틴을 제정 러시아 시대의 황제, 차르에 비유하고 있다.
푸틴 체제는 지난달 16일 ‘최대 정적’으로 꼽히던 야권 운동가 알렉세이 나발니의 옥중사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1일 장례식엔 수천 명이 모여 ‘푸틴 없는 러시아’ 등을 외쳤으나 조직적인 반정부 시위로 이어지지 못했다. 부인 율리아 나발나야가 대선 마지막 날인 17일 시위를 벌이자고 했지만 얼마나 참여할 지 미지수다. 12일 나발니의 최측근 레오니드 볼코프가 리투아니아에서 습격당하는 등 반체제 인사에 대한 위협도 여전하다.
서방 제재도 재집권을 막는 데 무력하다. 지난달 24일 우크라이나 전쟁 2주년을 맞아 서방은 한층 강화된 대(對)러 제재를 내놓았지만 서방 매체들조차 당장 효과가 나타날 것으론 보지 않고 있다. 지지율도 굳건한 편이다. 11일 친정부 성향 러시아여론조사센터 브치옴(VTsIOM)은 대선 예상 투표율은 71%, 푸틴의 득표율은 82%에 이를 것으로 예측했다.
그래도 대선은 푸틴에겐 꼭 필요한 절차다. 미국 외교협회(CFR) 토마스 그라함 선임연구원은 보고서에서 “푸틴에겐 승리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러시아 정치 시스템의 주인임을 보여주기 위해 압도적인 득표율로 승리해야 한다”고 했다. 2년 넘게 이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내부 지지를 확인할 필요도 있다.
성숙 단계 접어든 ‘푸틴주의’
푸틴이 구축한 체제를 전문가들은 ‘푸틴주의(Putinism)’라고 불러왔다. 러시아 민족주의, 종교, 보수주의, 국가자본주의(국가의 경제 장악), 미디어 장악의 결합으로, 그 목표는 푸틴이 2000년 첫 대선에서 내세운 ‘위대한 강대국 러시아의 부활’이다. 카네기 러시아 유라시아 센터 선임연구원인 안드레이 콜레스니코브는 7일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스에 기고한 글에서 “이번 대선으로 후기 푸틴주의가 성숙 단계에 접어들게 됐다”고 했다.
러시아식 민주주의인 푸틴의 ‘주권민주주의’는 민족, 러시아정교회를 내세워 비민주성을 포장한다. 실제로 전쟁을 반대하던 야권 후보인 보리스 나데즈딘의 대선 출마 자격이 선거관리위원회 결정으로 박탈됐고, 전쟁에 반대하지 않는 다른 후보 3명이 푸틴의 들러리를 섰다.
콜레스니코브 연구원은 “(처음 대통령에 당선된) 2000년에 이미 푸틴은 스탈린주의 국가를 부활시켰다”며 “차이가 있다면 당시엔 반근대적 권위주의를 일부 숨겼지만 이젠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서방과의 대결을 통해 푸틴이 권력 유지의 동력을 얻고 있다고 말한다. 러시아 출신으로 한국으로 귀화한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대 교수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두고 “미국의 패권이 약해진 틈을 노린 푸틴의 ‘제국 재건 프로젝트’”(『전쟁 이후의 세계』)라고 지적했다. 과거 ‘스탈린 제국’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를 ‘수복’해 자원과 공업 인프라, 숙련인력을 얻어 ‘소련식 중공업 복합체’를 재건하려 한다는 설명이다.
국방비 151조원…3년새 세 배
예상 외로 선전하고 있는 러시아의 전시경제도 푸틴에겐 집권 연장을 돕는 든든한 발판이 됐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러시아 경제가 지난해 3% 성장한 데 이어 올해 2.6% 성장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군비 지출로 경제가 성장하는 ‘군사 케인스주의’에 접어들었다고 분석한다. 러시아의 거시경제 분석 및 단기 예측 센터(CAMAC)는 2022~23년 러시아의 산업 생산량 증가분 중 60~65%가 우크라이나와의 전쟁 덕분이라고 밝혔다. 올해 러시아 국방비는 총 예산(36조6600억 루블, 약 534조원)의 3분의 1인 10조4000억 루블(약 151조원)에 이른다. 침공 전 마지막 해(2021년)에 비해 세 배 증가했다.
물론 푸틴의 집권 5기에 적지 않은 장애물이 놓여있다. 과도한 군비 지출은 ‘양날의 칼’이다. 러시아의 물가상승률(1월)은 7.4%에 육박하고 중앙은행의 기준 금리(2월)는 16%대에 이른다. 정부 투자 의존도가 높아지고 석유·가스 수출은 서방 시장 폐쇄와 할인 판매로 수익이 감소했다.
대외관계는 한층 꼬이고 있다. 푸틴은 2022년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동진을 막겠다며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지만, 되레 핀란드·스웨덴이 중립국 지위를 버리고 나토에 가입했다. 발트해 인접국들이 모두 나토 회원국으로서 러시아를 포위하는 형세가 됐다. 옛 소련 국가들을 유럽과 구분되는 유라시아권이라는 정체성으로 아우르며 군사·경제, 소프트파워 등을 포괄하려던 푸틴의 ‘유라시아주의’도 난관을 맞았다.
첨단기술 퇴보, 중국 의존도 위험요소
다른 장애물들도 있다. 정치적인 면에선 장기 집권에 대한 국민적 피로감, 경제 산업적인 면에선 서방과의 교류 단절에 따른 첨단 기술 및 경제산업 분야의 퇴보를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하다. 중국에 대한 의존도가 커지는 것도 위험요소다(외교안보연구소, ‘2024 국제정세전망’). 중국은 원유·가스 구매, 소비재·공산품 공급을 통해 러시아 경제에 상당한 도움을 줬다. 러시아는 대신 자동차 시장에 중국 기업 진출을 허용하고 블라디보스톡항 등 요충지를 중국에 개방했다.
가장 큰 관건은 미국과의 관계 설정이다. 11월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승리하면 대미 관계의 전기가 올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트럼프의 대통령 재임 시절 푸틴과 트럼프의 국익이 다방면에서 충돌해 양국이 신냉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도 있다. 외교안보연구소는 “향후 푸틴 체제는 대내적으로는 통제 강화와 자립적 경제구조 구축, 대외적으로는 미국 주도 질서에 대항하는 새로운 국제질서 구축을 위한 세력 규합에 진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러·북은 밀착, 한·러는?
푸틴 5기는 한반도에도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러시아와 북한은 우크라 전쟁을 계기로 급속히 밀착하고 있다. 애초 러시아는 소위 비우호국들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과의 무비자 협정을 유지하는 등 한국과의 관계 복원 의지를 보여왔으나 상황이 급변했다.
러시아가 대북 군사기술 지원을 본격적으로 실행하거나 북한이 러시아가 제안한 합동 군사훈련에 응할 경우 한·러 관계의 새로운 갈등 요인이 될 수 있다. 게다가 러시아가 올해 초 한국인 선교사를 간첩 혐의로 체포해 조사중인 사실이 지난 11일 공개됐다. 러시아가 한국의 우크라이나 전쟁 지원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특유의 ‘인질외교’를 구사하려 한다는 관측까지 나온다. 때문에 “한·러 수교 34주년 사상 최악의 관계”(고재남 전 국립외교원 교수)란 지적이 나온다.
하지만 한러 관계의 악화를 방치해선 안된다는 게 전문가와 전직 외교관들의 지적이다. 이석배 전 주러시아 대사는 “한미 동맹을 강화하면서 러시아, 중국 관계를 관리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고도의 외교력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이양구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도 “러시아는 한국의 중요성을 잘 안다. 위협적이지 않으면서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는 국가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와의 관계를 열고 생각할 것”이라며 “우리는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법치주의 등 원칙과 가치를 지키면서 공간을 찾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고재남 교수는 “당장은 러시아가 북한과 밀착하고 있지만 한반도에 미국의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으니 현재 상황을 개선하려 노력할 것”이라고 봤다.
백일현 기자 baek.il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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