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 든 제자 팔꿈치를 툭…서예 대가가 뜬금없는 행동 한 까닭

전수진 2024. 3. 14.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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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의 1898 전시관에서 이달 13일부터 22일까지 서예 전시회를 여는 정성훈 신부. 우상조 기자


붓을 잡은 신부님 5명이 13일부터 서예 전시회를 연다. 명동성당 1898 전시관에서다. 전시회 제목은 '십자가 영성,' 부제는 '다섯 신부들의 묵상 서예전'이다. 11일 서울 마포구 중앙일보에서 만난 정성훈 신부는 "붓글씨는 저희에게 기도의 다른 이름"이라며 "획을 그을 때마다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고, 신앙의 큰 덕목인 '비움'을 깊이 체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마침 사순 시기(부활절을 앞두고 약 40일간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며 지내는 영성의 시기)라는 점도 동기부여가 됐다.

신부 5인의 작품 중 일부. 정성훈 신부 제공


속세 나이로 올해 54세인 정 신부는 어린 시절부터 붓을 잡았다. 그러다 2015년 중국에 교포 사목을 위해 파견되면서 베이징(北京)에서 현지 체류 중이던 한국인 서예 대가인 이동천 선생을 만난다. 이 만남은 정 신부에게 제2의 서예 인생의 시작점이 됐다. 같은 붓, 같은 먹, 같은 종이인데도 다른 방식의 작품이 나오는 필법을 체험하면서다. 이후 선후배 동료 신부들에게 서예를 전파했고, 이번 전시회를 열게 됐다. 내년엔 5인의 신부가 연이어 개인전도 준비 중이라고 한다.

Q : 서예의 매력은.
A :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서예 DNA가 있다. 종교를 떠나 정신건강에도 서예는 크게 도움된다. 먹을 갈며 자기의 내면을 털어내고, 붓을 들며 기도와 수련을 하게 된다. 두 손을 경건히 모으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다. 일상의 모든 부분에서 할 수 있는 게 바로, 기도이고 서예라고 본다."

정성훈 신부는 "서예도 기도의 일종"이라고 말했다. 우상조 기자

Q : 작품을 보면 유독 번진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많은데.
A : 글씨는 선(線)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면(面)이다. 붓으로 면을 표현하기 위해 꺾어서, 붓의 모든 면을 사용한다. 한 번 붓을 들어 세 번 꺾어 쓴다는 뜻으로 '일파삼절(一波三折)'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붓의 궤적이 번지듯 남는다."

Q : 삐져나온 것 같은 획도 눈에 들어온다.
A : "이번 전시회 작품들을 다 좋아하지만, 그중 남덕희 신부가 출품한 '아갈(我渴, 성경에 나오는 말로,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혀 하는 말)'로 설명하고 싶다. 남 신부가 이 작품을 연습할 때, (이동천) 선생님이 갑자기 팔꿈치를 툭 치셨다. 일부러 훼방을 놓으신 건데, 뜻이 있었다. 남 신부가 강직하고 곧은 성격이기 때문에 글씨도 그렇게 쓰는 데, 일부러 그 틀을 벗어나 보라는, 일갈(一喝)의 뜻이었다. 붓이 원래 쓰려던 공간을 넘어가면서, '넘어섬,' 즉 초월이라는 것을 맛보게 됐다."

2016년 중국에서 한국과 중국의 서예가들이 합동 전시를 열었다. 맨 왼쪽이 정성훈 신부, 그 바로 옆이 이동천 선생이다. 정성훈 신부 제공

Q : 붓을 들 때 어떤 마음이 되나.
A : "마음을 비워야 한다. 서예는 어차피 자기와의 대면이자, 수련의 연장이다. 선생님이 항상 하시는 말씀이, '잘하려 하지 말고, 편하게 하라'는 것이다. 내가 마음을 비워야 글씨가 나온다. 혼은 글씨에 담아내야 한다. 어떤 신부님은 글씨 하나를 쓰면 1kg이 빠진다고도 하시더라. 이동천 선생님이 항상 강조하는, 전번필법'(轉飜筆法, 붓을 굴리고 뒤집으며 글씨를 써나가는 것)과 '신경필법'(神經筆法, 온 신경을 집중해 쓰는 법)의 비법을 익히는 과정이다."

Q : 관람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A : "우리야 사목을 하는 이들이니 신앙적 성장을 기도하지만, 사실 쉽지 않다는 걸 잘 안다. 일상의 바쁨 때문이다. 신앙이란 힘들 때 더 찾게 되고, 일상에선 멀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바쁜 일상 속에서도 저희가 쓴 글귀를 보며 '잠깐 멈춤'의 시간을 가지시면 어떨까. 조심스럽지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정 신부가 이번 전시에 출품한 작품 중엔 "매고 가면 짐, 안고 가면 힘"이라는 한글도 있다. 십자가를 마음에 두고 쓴 글귀라고 했다. 그는 "현대인들이 고통을 많이 겪는데, 서예를 통해 호흡을 길게 가져가면 스트레스 완화에 큰 도움이 된다"며 "실제 서예를 하는 이들이 수명이 길다는 얘기도 있다"며 웃었다. 이어 "우리의 전통인 서예를 잘 활용해 삶의 지혜를 나눴으면 한다"고 말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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