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교의 가장자리] 할부지! 사랑 달아요

2024. 3. 14.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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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윤 기자


“인사동 쪽으로 올라가는 출구에 나는 무릎 꿇고 엎드려 있다. 찌그러진 깡통 앞세운 채 미동도 없이. ‘도와주세요’ 휘갈긴 구걸로 쓸쓸하고 한껏 조아린 고개는 파묻혀 보이지 않는다. 바람은 힐끔거리고 연민은 냉랭하다. 뭐야, 왜 저러고 있어? 사지 멀쩡해 보이는데. 이런 속엣말들만 떨어져 빈 깡통을 들쑤신다. 그럴수록 내 목은 기어들어 어깨가 더 좁아진다.”

정우영 시 ‘무탈한 하루’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인사동 길목에서 무릎 꿇고 엎드려 동냥하는 노숙인 할아버지다. 나는 죄인마냥 조아린 고개를 파묻고 있다. 바람은 나를 힐끔거리고 차가운 연민만 스쳐 지나간다. 사람들이 투명한 유리 같은 나를 스쳐 지나가는 그때, 무언가 깡통에 바스락바스락 내린다.

“안녕, 할부지! 사랑 달아요.”

「 노숙인에게 사탕 내미는 아가
그 순수한 마음이 변혁의 시작
천안함 사건·세월호 참사 등
비극 되풀이 않게 대비해가야

슬그머니 눈을 드니 ‘아가의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본다. 두 돌이나 지났을까. 혀가 짧아 사탕을 사랑이라고 발음하는 아가가 ‘나’에게 사탕을 내민다.

“고맙다. 아가야. 고마워.”

사탕을 건넨 아가는 엄마 손을 잡고 멀어진다. 작은 성자 같은 아가의 온기는 무릎 꿇고 있던 노숙인을 일으켜 세운다.

눈 감고 아가가 준 사랑을 입에 넣는다.

달다. 살아야겠다.

아가가 준 사랑, 그 사탕을 입에 넣고 노숙인은 살아야겠다며 다짐한다. 한편의 쇼트 광고 같은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요즘 아가가 낯선 인물 곁으로 다가가도록 엄마가 손을 놓아줄 리가 없다. 드라마에서 연기하듯 시인이 노숙인 역할을 하는 이런 시를 배역시(配役詩)라고 한다. 시인은 우리 현실에 일어나기 힘든 장면을 재현하며, 우리가 어디로 마음을 모아야 할지 깨우친다.

정우영
『순한 먼지들의 책방』 정우영.

이 시가 실린 정우영 시집 『순한 먼지들의 책방』에는 “누군가 목덜미를 가만가만 쓰다듬어주는”(‘누군가 목덜미를 쓰다듬어주는 것처럼’) 위로와 격려가 평온하게 흐른다. 시인은 “맑은 햇살 푸지게 담아”(‘햇살밥’) 낸 환한 세상을 재현해 놓는다.

정우영 시인은 세 번째 시집 『살구꽃 그림자』에서 “구체적인 그 무엇들이 나를 이끈다”(‘시인의 말’)고 썼는데 카프카는 “어디에선가 도움이 기다리고 있으며, 나를 그리로 몰아가고 있다”라며, 도움을 기다리는 이를 생각하며 흐느껴 운다고 일기에 썼다.

“스물세 살의 마리 아브라함의 소송에 대한 기사를 읽고 흐느껴 울었다. 그녀는 가난과 배고픔 때문에 자신이 스타킹 미끄럼 방지용 끈으로 사용하던 남자 넥타이를 풀어서 그것으로 겨우 9개월밖에 안 된 자신의 아기 바르바라를 목 졸라 죽였다.”(1913년 7월 2일)

‘울보 카프카’라는 글을 쓰고 싶을 정도로 그의 글에는 ‘울었다’는 단어가 종종 나온다. 그는 “꿈꿔라. 울어라, 가엾은 족속이여”라고 일기에 썼다.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을 무차별 폭격하던 독일의 심리전은 영국 시민들이 절망과 공포에 빠져서 대항 의지를 완전히 상실하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놀랍게도 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고 에리히 프롬은 썼다.

“고통의 공유는 피격자들의 저항을 공고히 했을 뿐만 아니라, 공포 폭격으로 상대 군의 사기가 꺾여 전쟁이 빨리 종식되리라고 믿었던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입증했다.”(에리히 프롬, 『소유냐 존재냐』)

독일군이 런던을 무차별 폭격해도 영국 시민들은 겁먹지 않았다. 고통을 공유(Common Suffering)하며 오히려 단결하여 무너진 건물을 재건하고, 공장에 가서 군수물자를 만든다.

정우영 시인이 “기사단장은 무딘 칼을 거두라”(‘자정을 독파하다’)고 언급한 무라카미 하루키는 일본의 교육을 지적한다. “타인의 아픔을 ‘상정’하는 일이 없는, 상상력을 상실한 잘못된 효율성”(『직업으로서의 소설가』)만 교육한 결과 날아온 ‘청구서’가 2011년 3월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라고 하루키는 진단한다.

햇살 따사로운 봄날에 두 가지 기일(忌日)이 있다. 2010년 3월 26일에 있었던 천안함 사건이 올해로 14주기,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가 올해로 10주기를 맞는다. “가지런히 놓인 운동화들이 호소합니다. 내 사람을 찾아달라”(‘저기에 내 사람이 있다’)는 가을날 이태원의 비극이 다시는 없도록, 기억하고 대비해야 한다.

며칠 후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다. 거대한 공약 이전에, 혀 짧은 아가가 노숙인에게 사탕을 주면서 “할부지! 사랑 달아요”라고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 있는지 확인해보자. “우주도 본래 먼지로부터 팽창하고 있다”(‘순한 먼지들의 책방’)는 구절처럼 거대한 변혁은 먼지만큼이나 작은 저 아가의 마음에서 팽창할 것이다. 누가 저 작은 아가의 마음을 갖고 개벽에 참여하려 할까. 아가의 눈을 뜬 먼지들이여, 4월 10일에는 투표하여 햇살밥 닮은 세상을 만들자.

시인·숙명여대 교수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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