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비밀무기' 초코바... 미국이 훈장 내린 까닭
[이준목 기자]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 tvN |
초콜릿(Chocolate)은 '신의 선물'로도 불린다. 초콜릿은 중남미에서 생산되는 카카오(Cacao) 열매를 원료로 하여 다양한 재료를 첨가해 만든 달콤한 맛의 과자 혹은 음료를 의미하며, 수천년의 역사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 세계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기호식품으로 자리잡았다. 하지만 달콤쌉싸름한 초콜릿의 이면에는 인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피눈물'도 녹아있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이 잊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3월 12일 방송된 tvN <벌거벗은 세계사> 142회에서는 '달콤함이 불러온 재앙, 인간의 욕망이 깃든 초콜릿'편을 통하여 초콜릿이 인류 역사에 미친 숨은 뒷이야기를 조명했다. 황규득 한국외대 아프리카학부 교수가 이날의 강연자로 나섰다.
사람들을 사로잡은 초콜릿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초콜릿의 최초 기원은 약 3200년 전 중남미 지역에 존재했던 올메카 문명(Civilización Olmec)이다. 올메카 지역은 초콜릿의 원료인 카카오나무를 재배하기에 좋은 환경을 갖추고 있었다. 학계에서는 올메카인들이 인류 최초로 카카오를 재배하고 초콜릿 음료를 먹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뒤를 이은 마야 문명(Civilización maya)에서는 카카오를 '신이 주신 열매'로 신성하게 여겼고 카카오의 풍년을 기원하기 위하여 인신공양을 통한 제사를 올리기도 했다. 오늘날 카카오의 어원 역시 'KAKAW'라는 마야 문자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문명에서 초콜릿은 오늘날까지 달콤한 디저트라기보다는 보약같은 건강식품의 개념으로 소비됐다. 카카오는 에너지가 높은 고열량 식품이자 천연비타민 성분을 함유하여 피로회복과 스트레스 저하에 큰 효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Age of Discovery)를 맞이하여 유럽인들의 신대륙 진출이 이루어진다. 스페인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는 1521년 당시 중남미의 지배세력이던 아스테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식민지를 건설했다. 아즈텍의 금은보화와 카카오에 눈독을 들였던 스페인은, 메소아메리카 곳곳에 카카오 재배지를 건설했고, 이때부터 유럽으로 초콜릿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초창기에는 스페인 사람에게 그저 쓰디쓰기만한 초콜릿은 혐오의 대상에 불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초콜릿의 영원한 친구인 설탕을 만나게 되면서 상황은 바뀐다. 노예무역으로 들어온 설탕은 당시 유럽에서 귀족들만 즐기던 사치품이었다. 초콜릿과 설탕이 '환상의 궁합'이라는 것이 알려지면서, 17세기에 이르러 스페인 왕족과 귀족들에게 초콜릿은 상류층의 필수품으로 높은 인기를 누리게 된다.
스페인이 독점하던 초콜릿은, 프랑스 왕실과의 정략 혼인을 통하여 '혼수품'으로 초콜릿을 가져간 것을 계기로, 프랑스와 유럽 전역까지 퍼지게 된다. 17~18세기에 들면 유럽 상류층의 초상화에는 초콜릿 음료가 빈번하게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초콜릿음료 1잔의 가격으로 빵 15개를 구입하는 게 가능했을 만큼 상류층에게만 허용된 고가의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또한 프랑스 귀족들 사이에서는 초콜릿이 '사랑의 묘약'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더 인기를 끌었다. 초콜릿에는 '페닐에틸아민'이라는 성분이 포함되어 있어서 중추신경을 자극하여 도파민의 분비를 촉진하는데, 이는 연애 초기에 설렘과 흥분을 느끼는 감정과 유사한 효과를 내기 때문이다. 초콜릿이 성적인 효과를 촉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최음제같은 효과를 기대하고 복용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1657년 영국에서는 초콜릿 음료를 제공하는 '초콜릿하우스'가 등장한다. 이전까지 왕실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초콜릿이 부유한 상인과 지식인 계층까지 전파된 것이다. 이를 기점으로 유럽 곳곳에서 수제 초콜릿 장인들이 가게를 열면서 초콜릿 음료의 대중적 인기는 크게 폭발하게 된다.
하지만 유럽에서 초콜릿의 인기가 높아질수록 고통을 받았던 것은, 바로 원료인 카카오의 원산지이자 스페인에 정복 당한 메소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이었다. 원주민들은 가혹한 착취와 열악한 노동환경으로 고통을 받았고, 저항하면 산 채로 불태우거나 배를 가르는 잔혹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유럽의 초콜릿 열풍은 바로 이러한 원주민들의 희생과 피눈물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산업혁명 시기에 접어들며 1847년, 영국의 조셉 프라이는 '카카오를 음료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섭취할 수는 없을까'라는 발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최초의 고체 초콜릿이 탄생하게 된다. 단시간에 빠르게 에너지를 채워주는 초콜릿은 체력보충이 절실한 노동자들의 입맛도 사로잡으며 큰 인기를 끌게 된다.
또한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초콜릿의 대중화에 이어 카카오 재배국까지 바꿨다. 날로 높아지는 초콜릿의 수요를 메소아메리카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졌고, 19세기 들어 유럽과 중남미, 아프리카를 잇는 삼각무역의 과정을 통하여 카카오나무는 원산지를 벗어나 아프리카에서 재배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카카오의 주산지는 중남미에서 서아프리카로 넘어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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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국왕 레오폴드 2세(1835-1909)는 '하얀 악마'로 불리우는 희대의 학살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당시는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와 식민지 경쟁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레오폴드 2세는 신생독립국이던 벨기에를 성장시키는 길은 식민지 확보라고 생각했고, 열강들의 손이 아직 미치지 않고 원주민 족장들이 다스리던 아프리카의 콩고에 눈독을 들였다.
레오폴드 2세는 원주민 세력을 속여 불평등 계약을 체결했고, 이를 근거로 1884년 아프리카 땅의 분할을 놓고 유럽열강들이 개최한 베를린 회담에서 콩고의 단독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그는 벨기에 국토의 75배에 이르는 콩고를 아예 자신의 '개인 사유지'로 만들어 침탈하려는 계획을 추진한다.
레오폴드 2세는 콩고에서 생산되는 고무와 상아, 카카오를 수탈하며 막대한 이익을 챙겼다. 특히 그는 '초콜릿 중독자'로도 유명했는데 하루에 초콜릿을 10개씩 먹거나, 한번에 1.6L짜리 핫초코를 마시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레오폴드 2세가 콩고에서 벌인 악행은 상상을 초월한다. 1891년 그는 원주민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하여 상아와 고무독점법까지 제정하고, 콩고 일대에는 고무와 카카오 농장들이 우후죽순 들어서게 된다.
원주민들은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고 가혹한 노동환경에 내몰려야 했다. 작업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이들은 손목을 자르게 했다. 두 손이 모두 잘려 일할 수 없는 사람은 죽이고 다음 사람에게 할당량을 떠넘겼다. 1896년 독일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하루에만 콩고에서 잘린 손목의 개수가 무려 1308개에 달했다고 한다. 자녀의 잘려나간 손과 발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한 원주민 아버지의 모습이 찍힌 사진은 당시의 참상을 잘 보여준다.
학계에서는 이 시기에 레오폴드 2세에게 학살 당한 콩고인의 숫자가 1000만 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반면 레오폴드 2세가 콩고인을 수탈하여 얻은 수익은 약 2억 2000만 프랑(현재 한화 1조 5000억)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1900년대에 이르러 영국인 선교사들에 의하여 레오폴드 2세의 악행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레오폴드 2세는 국제 여론이 악화되자 황급히 증거인멸에 나섰는데, 무려 24시간 관련 문서를 소각했는데 콩고 수탈에 대한 기록을 모두 없애지 못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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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로 '전쟁'은 초콜릿의 전 세계적인 확산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1차대전까지만 해도 군인들의 전투식량은 통조림이었다. 그런데 맛없는 통조림에 질린 군인들이 식사를 기피하며 건강이 악화되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2차대전 시기에 접어들며 입맛과 영향을 모두 갖춘 새로운 전투식량을 개발하면서 휴대가 간편하고 열량이 높은 초콜릿이 대안으로 급부상한 것.
미군은 2차대전 당시 연평균 기온이 30도가 넘는 무더운 태평양 전선에서 전쟁을 치르다보니 전투식량인 초콜릿이 쉽게 녹는다는 문제점이 발생했다. 이에 미군은 초콜릿 외부를 설탕으로 코팅하여 잘 '녹지않는 초콜릿'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중적인 사랑을 받는 히트상품으로 이어지게 된다.
독일 역시 초콜릿을 전쟁중에 적극 활용했다. 독일 나치 정권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는 장병들이 술과 담배를 즐기는 것을 혐오하여 초콜릿을 대신 먹으라는 지시를 내렸을 정도였다.
또한 독일 공군은 영국을 공습한 본토 항공전 당시 잦은 출격으로 폭격기 조종사들의 피로도가 급격히 높아지자 초콜릿과 커피, 콜라 열매를 결합한 '쇼카콜라(Schokakola)'를 제작하기도 했다. 요즘 에너지 음료의 3배 이상에 이르는 높은 카페인으로 각성효과가 높았던 쇼카콜라는,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용도로 이용했다.
또한 나치는 고체 초콜릿으로 위장한 특수 폭탄을 개발하기도 했다. 영국의 수상이던 윈스턴 처칠이 초콜릿 마니아라는 것을 이용한 암살용 폭탄이었다. 하지만 영국의 정보기관에 사전에 발각되어 실행되지는 못했다.
한편으로 초콜릿의 인기가 높아지다보니 생각지 못한 부작용도 발생했다. 장병들이 아껴 먹어야 할 전투식량을 너무 맛있어서 빨리 먹어치우는 문제점이 일어난 것.
이에 미군은 'D-레이션바'라는 새로운 개량형 전투식량 초코바를 개발했는데, 무려 49도의 고온에서도 녹지 않으며 한 개에 밥 6공기에 해당하는 1800칼로리의 고열량을 함유한 제품이었다.
문제는 D-레이션바가 기존 초코바에 비하면 맛도 없는 데다, 마치 벽돌처럼 너무나 딱딱해서 빨리 먹을래야 먹을 수가 없었다는 것, 그나마 잘게 쪼개 먹으려면 총검이 필요할 정도였다고. 이에 병사들 사이에서는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나왔고 '히틀러의 비밀무기'라고 불릴 정도로 악평이 쏟아졌다고 한다.
그럼에도 2차대전 당시 생산·보급된 D-레이션바는 무려 30억 개에 이르며, 승전 이후 제조업체는 전투식량을 맛없게 잘 만든 공로(?)를 인정받아 미 국방부 훈장까지 수여받았다는 훈훈한 후일담을 남겼다.
▲ tvN <벌거벗은 세계사>의 한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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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는 현재 전 세계 카카오 생산량의 73%에 이를 만큼 막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서아프리카에 속한 코트디부아르는 1960년 독립한 이래 카카오 재배를 국가 핵심 수출산업으로 육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카카오 산업에 지나치던 의존하던 코트디부아르는 과잉 공급으로 인하여 경제가 휘청거리가 1987년 국가 파산을 선언해야 했다.
현대에 접어들며 다국적 초콜릿 기업들의 등장은 이러한 아프리카의 혼란한 상황을 악용하여 막대한 이익을 누렸다. 카카오 최대생산국인 코트디부아르의 카카오 농장들은 불공정 계약과 저임금의 노동력 착취, 인신매매가 만연하며 '현대판 노예제도'로 불릴 만큼 지금까지도 아프리카의 사회적 문제로 자리잡았다.
또한 카카오 농장을 짓기 위한 대규모의 산림벌채로 인한 자연파괴가 심각해지면서 '2030년이면 코트디부아르의 열대우림이 모두 사라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아프리카의 기상이변과 기후위기는 곧 카카오 가격의 폭등으로 이어지며, 달콤한 초콜릿을 아무 생각없이 즐겨 소비해왔던 현대 서구사회와 평범한 소비자들에게도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탐욕은 일체를 얻고자 욕심내어서 도리어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셀 드 몽테뉴의 격언이다. 초콜릿의 비극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분쟁으로부터 시작되어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아픈 역사다. '신이 내린 선물'로 불린 초콜릿은 그 달콤함으로 인류의 입맛을 사로잡아왔지만, 그 이면에는 비극의 역사에 휘말려 쓰디쓴 눈물을 흘려야 했던 이들도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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