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선수 유일 KBL 라운드 MVP 이정현…“자존심 지켰습니다”
올 시즌 프로농구는 ‘외국인선수 천하’였다. 구단별로 막강한 화력을 지닌 외국인선수들이 맹활약하면서 코트 판도를 좌우했다. 달라진 분위기는 기자단 투표로 선정하는 라운드 MVP 결과에서 잘 드러난다. 1라운드 MVP인 원주 DB 디드릭 로슨을 시작으로 창원 LG 아셈 마레이, 수원 KT 패리스 배스, 대구 한국가스공사 앤드류 니콜슨이 2~4라운드 MVP를 차례로 가져갔다.
KBL은 1997년 출범 이래 월간 혹은 라운드 MVP를 선정해왔다. 원년부터 2014~2015시즌까지는 매달 11~3월 MVP를 뽑았고, 다음 시즌부터는 구단별로 9경기를 소화하는 라운드마다 MVP를 뽑았다. KBL 역사상 외국인선수가 월간 혹은 라운드 MVP를 개막부터 4회 연속 싹쓸이한 적은 올 시즌이 처음이다.
갈수록 국내선수의 존재감이 희미해지던 상황에서 혜성처럼 떠오른 이가 있다. 바로 고양 소노 주전 가드 이정현이다. 이정현은 지난 11일 발표된 KBL 5라운드 MVP에서 유효표 93표 중 49표를 얻어 32표를 받은 배스를 제치고 수상자로 선정됐다. 2021년 데뷔 후 처음으로 개인 트로피를 거머쥔 이정현을 12일 홈구장인 고양소노아레나에서 만났다.
전북 군산에서 나고 자란 1999년생 이정현은 일찌감치 대형 유망주로 꼽혔다. 포인트가드로선 시야가 넓고, 돌파력이 좋고, 볼 핸들링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고, 슈팅가드로선 외곽슛이 정교하고, 클러치 능력이 타고났다는 호평이 뒤따랐다.
군산고와 연세대 시절 연령별 국가대표로도 활약한 이정현은 2021년 KBL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에서 고양 오리온의 지명을 받아 프로 유니폼을 입었다. 그러나 데뷔 이후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오리온이 농구단 운영에서 손을 떼기로 하면서 이듬해 소속팀이 캐롯 점퍼스로 바뀌었다. 그런데 캐롯의 운영 주체인 데이원스포츠가 모기업 대우조선해양건설의 자금난 문제로 선수들에게 월급도 지급하지 못하다가 지난해 6월 KBL로부터 퇴출되면서 올 시즌부터는 소노 소속이 됐다. 이정현은 “데뷔 이후 매년 유니폼을 교체해야 했다. 사회로 나오자마자 이런 일을 겪어 개인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래도 이제는 최대한 좋게 생각하려고 한다”고 미소를 지었다.
외부 환경은 마음대로 따라주지 않았지만, 이정현은 묵묵히 성장했다. 평균득점을 비롯해 각종 공수 지표를 꾸준히 늘려왔고, 소속팀에서의 존재감도 날로 커져 갔다. 날개는 올 시즌 더욱 활짝 폈다. 이정현은 지난 12일 기준으로 37경기에서 평균 21.5점을 넣어 전체 6위를 기록 중이다. 국내선수로 범위를 한정하면 압도적인 1위다. 또, 평균 3점슛과 어시스트는 각각 2.7개와 6.6개로 전체 2위를 달리고 있다. 수비 또한 탄탄해 경기당 1.8개의 상대 볼을 훔쳐 2위로 이름을 올렸다. 특히 지난 5라운드에선 9경기 동안 평균 24점, 어시스트 6.7개, 스틸 2.1개로 활약해 라운드 MVP가 됐다.
이정현은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받아보는 트로피다. 사실 1·2·4라운드 MVP 투표에서 계속 2위를 했다. 한 번쯤은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번번이 밀려 실망도 했다”면서 “뛰어난 외국인선수들이 앞선 라운드 MVP를 싹쓸이했다. 이번 수상으로 국내선수의 자존심을 조금은 지켰다고 생각한다. 또, 소노 창단 후 소속선수가 처음 받는 상이라 더욱 값지다”고 웃었다.
아쉬움도 있다. 창단 시즌을 치르고 있는 소노는 12일까지 8위(15승32패)로 처졌다. 전체적인 라인업의 힘이 떨어지는데다가 주전 슈팅가드 전성현이 허리 부상으로 자기 몫을 하지 못하면서 6강 경쟁에서 밀려났다. 이정현은 “5라운드 MVP를 탔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아쉬움이 있었다. 내가 잘하더라도 소속팀 성적이 좋지 않으면 100% 행복할 수가 없더라. 내년 시즌에는 6강 플레이오프에서 봄농구를 즐기고 싶다”고 했다.
이정현의 별명은 ‘Hype Boy’다. 걸그룹 뉴진스를 좋아해 동명의 등장곡을 골랐는데 청량한 이미지가 맞아떨어져 자연스럽게 별명이 따라붙었다. 이처럼 이정현은 맑고 유한 스타일이 인기의 요인으로 꼽히기도 하지만, 반대로 선수로서 독한 면이 부족하다는 평가도 뒤따른다.
그러나 이정현은 “내가 생각해도 ‘해맑은’ 이미지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내면에는 독함과 승부욕이 당연히 있다”면서 “김승기 감독님께서 ‘다음 시즌에는 이정현을 정규리그 MVP로 만들겠다’고 말씀하신 기사를 봤다. 감사함과 부담감이 모두 있지만, 감독님의 말씀이 과대평가가 되지 않도록 내년에는 라운드 MVP를 넘어 정규리그 MVP를 목표로 뛰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고양=고봉준 기자 ko.bong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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