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여행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 줄 책

김규영 2024. 3. 13.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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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최장편의 2013년 부커상 수상작, 엘리너 캐턴의 <루미너리스>

[김규영 기자]

뉴질랜드 여행을 앞두고 고민에 빠진다. 어떤 책을 가져갈 것인가. 일정을 짜고 가방을 싸는 것만큼 신중하게 서가 앞을 서성이는 활자중독자에게 자신있게 권한다. J.R.R.톨킨의 <반지의 제왕>은 넣어두시라. 광활한 풍광을 담은 피터 잭슨 감독의 영화는 좋은 동반자이나 원작은 뉴질랜드를 알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1권 겉표지 <루미너리스> 엘리너 캐턴, 2016, 다산책방
ⓒ 다산책방
 
현재 뉴질랜드의 유일한 부커상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는 <루미너리스>(2016, 다산책방)는 2013년 수상 당시 두 가지 기록을 함께 세웠다. 당시 28세였던 엘리너 캐턴은 역대 부커상의 최연소 수상 작가였고, 석사 논문을 겸하여 쓴 첫 번째 소설 다음으로 쓴 두 번째 작품인 <루미너리스>는 부커상 역대 가장 긴 작품이다.

엘리너 캐턴은 최근 세 번째 작품을 최근에 발표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숲의 이름에서 제목을 가져온 작품, <버냄숲>(the Burnham Wood)은 뉴욕타임즈가 선정한 2023년 중요한 작품 100선에 드는 등 역시 각광을 받고 있다.

그에 비해 국내에서는 <루미너리스>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분량이 주는 부담감도 있지만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별자리가 중요한 소재로 쓰인 탓도 있을 것이다. '루미너리스'(luminaries)는 권위자, 연예인을 가리키기도 하며, 스스로 빛을 내는 발광체를 말한다.

점성술에서는 해와 달을 뜻한다. 작가는 주요 등장인물 중 열두 남자를 별, 다른 일곱 명을 행성으로 구분하고, 각 장의 시작마다 위도경도에 따라 달라진 별자리 그림을 넣었다. 별자리와 점성술을 곁들여 읽어야 작품의 진가를 알 수 있겠다.
  
▲ 1부의 별자리 그림 <루미너리스> 1권 중에서
ⓒ 다산책방
 
마오리족 한 명과 중국인 두 명을 포함한 열두 남자는 각각 열두 별자리의 인물이다. 그들은 중심 사건에서 해당 별자리 태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해와 달에 해당하는 두 남녀는 열두 별자리와 같은 주변 인물들로 인해 구구절절한 일련의 사건을 겪는다.
일 년 동안 일어난 일이 역순으로 기술되고 각 장의 제목은 별자리와 행성, 심지어 광물들의 의미가 언급된다. 별자리와 인물의 역학관계는 마치 음양오행과 사주의 관계와 같아서 각 별자리의 특성을 이해한다면 훨씬 좋겠지만, 나처럼 해당 정보를 완전히 배제하고 읽어도 매우 흥미진진하여 여행 중에 1200쪽 분량을 모두 읽을 수 있었다.
 
▲ 4부 별자리 그림 <루미너리스> 2권 중에서. '펭가-와-와'는 마오리 달력 열한 번째 달로 '4월'을 이르는 말 (본문 주석)
ⓒ 다산책방
 
작품은 1860년대 뉴질랜드 골드러시를 배경으로 삼고 있다. 1840년 영국과 마오리족 사이에 체결된 와이탕이 조약 이후 뉴질랜드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식민지에서 분리되어 대영제국의 왕령식민지가 된다.
이후 영국 등 유럽과 호주에서 이민자가 급증하는데 남섬의 금광 붐이 그에 일조한다. 주요 무대인 호키티카 지방은 호주와 뉴질랜드 사이의 태즈먼해를 면한 서부 지역으로 마운틴 쿡으로 잘 알려진 서던 알프스의 산맥 북쪽에 해당한다.
  
▲ 배경이 되는 호키티카 인근 지도 <루미너리스> 1권 중에서
ⓒ 다산책방
 
금광을 향해 몰려든 <루미너리스>의 다양한 인물들이 어떤 사연을 품고 뉴질랜드에 오게 되었는지, 그들이 마주한 땅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듣다 보면 어느 여행 책자에서도 만날 수 없었던 생생함으로 현재 뉴질랜드를 바라보게 된다.
 
▲ 뉴질랜드 북섬 <루미너리스>와 함께한 뉴잘랜드 여행길에서
ⓒ 김규영
 
열두 명의 남자들이 준비한 은밀한 회합에 변호사 출신의 월터 무디가 우연히 발을 들여놓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2주 전, 금광 마을 호키티카에서 사망 사건 하나, 실종 사건 하나, 자살미수 사건 하나가 동시에 일어났다.

열두 남자는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의 전말을 꿰어맞추기 위해 모였지만 그들의 퍼즐 조각은 외곽에 불과하다. 독자 역시 혼란에 빠지지만, 2권 재판 장면에 접어들면 과거의 장면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몰입감은 최고조로 향한다.

특히 흥미로운 지점은 금을 찾아 혈안이 된 이민자들과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는 마오리족 청년 테 라우 타우웨어의 행보에 있다. 타우웨어는 '녹암 채집자'이며 영어 통역을 부업으로 한다.

백인 이민자들은 마오리족의 부적 정도로 여기며 대수롭지 않게 보았던 녹암은 마오리어로 포우나무(pounamu)라고 부르며 지금도 그린스톤 또는 마운틴 제이드(옥)이라는 이름으로 인기가 높은 세공품이다. 그러나 진짜 '녹암'은 뉴질랜드 남섬에서만 채취되는 것으로 기념품가게에 전시된 대부분의 제품은 수입재료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포우나무는 절대로 팔지 않으니까. 앞으로도 절대로 팔지 않을 것이다. 마나를 돈 주고 살 수 없는 것처럼, 보물에 가격을 매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리고 신과 거래를 할 수도 없는 거고. 금은 보물이 아니다. 타우웨어는 이것을 잘 알았다. 금은 온갖 자재들과 같아서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았다. 금은 과거로부터 앞으로 앞으로 흘러갈 뿐이다." (1권 155쪽)
 
 
금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타우웨어가 다른 사람들과 엮이게 된 것은 사건의 중심이 된 오두막이 포우나무를 많이 채취할 수 있는 아라후라 골짜기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오두막에 살고 있던 웰스는 마오리족의 문화를 진심으로 대했기에 두 사람은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타우웨어는 웰스의 죽음을 처리하는 백인들의 영혼없는 관습에 분노한다. 장례의 방식도 적절해 보이지 않았고 오두막과 땅을 포함한 웰스의 재산이 바로 매물로 나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타우웨어는 (...) 땅이 (...) 이윤 때문에 팔릴 때마다 굉장히 화가 났다. 타우웨어가 아는 한 클린치는 아라후라를 사기 전에 거기서 시간을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는 구매하고 나서도 이제 법적으로 그의 소유가 된 땅에 단 한 번도 발을 들이지 않았다. 그러면 대체 뭐하러 산단 말인가? 클린치는 거기에 머물 생각이 있었을까? 토지를 경작할 생각은 있을까? 나무를 베어 재목을 만들 생각은? 강에 둑을 쌓을 생각은? 갱도를 파고서 금을 캘 생각은 있나?

지금까지 그가 한 일이라고는 팔기 좋게 크로스비 웰스의 오두막을 비운 것 말고는 없었다. 그나마 그것도 대리인을 시켰고. 그것은 기술도, 애정도, 몇 시간의 끈기 있는 근면도 필요치 않은 공허한 재산이었다. 그런 재산은 폐물에서 태어나 폐물밖에 나놓지 않는, 쓸모없는 폐물이 될 뿐이었다. 타우웨어는 땅이 그저 모양만 다른 화폐인 것처럼 취급하는 사람을 존중할 마음이 없었다. 땅은 주조할 수 없는 것이다! 오로지 거기 살며 아껴주어야 하는 것이다. (2권 17쪽)
 
 
마오리족 청년의 분노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금에 혈안이 되어 금광 채굴권을 사고 하염없이 금을 캐는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지만 '땅을 화폐 취급'할 수는 없다. 부동산 관련 정책으로 선거와 정치판은 물론 전국적으로 들썩거리며 휘둘리는 우리 모습이 부끄러워진다. 마오리족 외에도 중국인, 노르웨이인, 영국인, 호주인, 등 별자리만큼 다양한 출신과 직업을 가진 인물들의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혼란스럽지만 정교하게 돌아가는 <루미너리스>였다.
 
▲ 2권 겉표지 <루미너리스> 엘리너 캐턴, 2016, 다산책방
ⓒ 다산책방
 
같은 제목으로 제작된 드라마도 인기가 높다고 한다. 엘리너 캐턴이 직접 각색했지만, 원작의 풍성한 내용을 그대로 담을 수가 없어서 한 인물 중심으로 다시 써야 했다고 한다. 그러니 비행기를 타지 않고도 19세기 뉴질랜드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길!

덧붙이는 글 | 개인 SNS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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