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美 만리장성'…매일 1만명이 목숨 걸고 국경 넘는다
지난 4일(현지시간) 미국 서남부 애리조나주(州)의 주도 피닉스에서 차로 3시간 달려 도착한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마을 ‘노갤러스(Nogales)’. 마을 남쪽엔 9m 높이의 철제 장벽이 국경을 따라 끝없이 이어졌다. 미국이 세운 이 장벽 안쪽은 애리조나주 노갤러스, 벽 너머는 멕시코 소노라주 ‘노갈레스(스페인어 발음)’다.
국경 봉쇄의 상징이 된 철제 장벽이 늘어선 노갈레스 등의 멕시코 접경 마을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불법 이민 문제가 조 바이든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대결 구도로 굳어진 11월 미 대선의 최대 이슈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지난달 갤럽의 여론 조사에서 ‘미국의 가장 큰 위협 요인’을 묻는 질문에 미국인 28%가 이민 문제를 꼽았다. 지난해 8월 조사에서 9%였던 답변 비율은 반년 만에 3배 이상 높아졌다. 이민에 대한 우려가 경제(12%)와 물가(11%) 문제를 앞섰다. 1992년 빌 클린턴 대통령의 당선 이후 자리잡은 ‘선거=경제’란 공식마저 뒤집을 만큼 뜨거운 쟁점이 됐다.
하루 1만명…급증하는 불법 이민
노갤러스에 세워진 장벽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3144㎞ 중 이미 벽이 설치된 1049㎞ 구간의 일부다. 트럼프의 구상처럼 나머지 구간에도 장벽을 세우면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만리장성의 총연장 6300㎞의 절반에 해당하는 ‘미국판 장성’이 완성된다.
노갤러스의 장벽 위엔 날카로운 철조망도 여러 겹 설치돼 있었다. 장벽을 따라 살펴보니 일부 철조망엔 벽을 넘다 걸린 사람이 남긴 옷가지가 매달려 있었다. 벽을 넘다 추락해 숨진 이를 추모하기 위해 둔 꽃다발도 볼 수 있었다. 관세국경보호국(CBP) 순찰대원은 “언제 어디서든 불법 이민자들이 벽을 넘는다”며 “조명이 설치되지 않은 곳에도 열 감지기 등으로 밤에도 24시간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한 달간 멕시코 국경을 넘은 불법 이민자는 30만명을 넘어서며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하루에 1만명 이상이 벽을 넘고 있다는 얘기다. 기자는 이날 순찰대원과 함께 국경 일대에서 대기했다. 기자가 있던 곳에선 불법 이민자가 나타나진 않았지만, 밤새 긴급 무전이 이어졌다. 순찰대원은 "이곳은 평소보다 조용했다”고 말했다.
“불법 이민은 바이든의 침공”
트럼프 측은 선거 유세 중 상대적으로 관대한 국경 정책을 폈던 바이든 정부에 들어 불법 입국이 폭증했다는 점을 집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실제로 트럼프 정부 때 한해 40~50만명 수준이던 멕시코를 통한 불법 월경 인원이 지난 한해 247만여명에 이르렀다.
트럼프는 지난달 29일 텍사스 주의 국경도시 이글패스를 방문해 “불법 이주민 유입은 바이든의 침공”이라며 “미국은 지금 살인·마약 같은 바이든표 이주자 범죄가 창궐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특히 최근 베네수엘라 출신 20대 불법 이민자가 아침 운동을 하던 22세 미국인 여대생을 살해한 사실이 알려져 부정적인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퓨리서치센터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의 약 80% 바이든 정부의 이민 정책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결국 상대적으로 관대한 국경 정책을 폈던 바이든 대통령도 국경 통제 강화 방안이 담긴 행정조치를 검토하기로 했다. 트럼프가 이글패스를 방문한 날, 텍사스의 다른 국경 마을 브라운즈빌을 찾아간 바이든은 국경 통제 인력·장비 확충안이 포함된 예산안을 의회가 처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어가 ‘외국어’ 인 노갤러스
불법 이민의 통로 격인 노갤러스에선 영어를 쓰는 사람을 찾기가 오히려 어려울 정도였다. 기자가 행인에게 말을 걸면 스페인어로 “영어를 못한다”는 답이 들어오기 일쑤였다.
마을 식당 앞에서 만난 호아킨 세라노는 “나도 30년 전 불법으로 저 벽을 넘어 미국에 왔다”며 “지금은 합법 체류 자격을 얻었고, 최근 통행이 재개되면서 멕시코를 오가면서 산다”고 밝혔다. 불법 이민이 대선 이슈로 부각된 데 대해 세라노는 “사람들은 그저 먹고 살기 위해 장벽을 넘는다”고 주장했다.
출국은 자유…입국은 철저한 통제
바이든 정부는 지난 1월 “불법 이민 증가세가 꺾였다”며 노갤러스를 포함한 4곳의 검문소를 통한 멕시코 통행을 재개했다. 통행이 재개된 노갤러스의 검문소엔 총을 든 군인이 배치돼 있었다. 하지만 멕시코로 가는 과정은 간단했다. 신분증을 보여달라는 요구조차 없이 자유롭게 걸어갈 수 있었다.
반면 미국으로 돌아오기 위해선 까다로운 절차가 거쳐야 했다. 멕시코인들은 대부분 신분증 검사에 이어 X레이 검색대에서 소지품 검사까지 받아야 했다. 동양인인 기자에겐 “시민권자인가”라고 물은 뒤 운전면허증만 확인하고 입국을 허가했다.
현지에서 만난 사람들은 “불법 입국을 위해선 벽을 오르거나 허술한 면을 노리고 큰돈을 내고 브로커를 사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실제 국경 일대에선 냉장차에 숨어 입국을 시도하다 냉동 장치가 고장나 냉동고에서 집단 사망하는 사건이 종종 발생한다. 지난 10년간 이렇게 멕시코 국경을 넘다 사망한 사람들은 4274명에 달한다.
성난 민심…“자국민 먼저 도우라”
국경을 넘은 불법 이민자 중 일부는 노숙자 등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하는 보호소로 찾아간다. 5일 새벽 5시 기자가 찾은 투산의 한 보호소에선 하루 10명으로 제한된 추가 입소 자격을 얻기 위해 수십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이날 정원 초과로 입소하지 못한 미국인 구스타보 헬라는 “불법 이민자 때문에 나처럼 도움이 절실한 미국인들이 박대당하고 있다”며 “멕시코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몰려오는 사람들을 먼저 돕는 정부를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실제로 불법 이민자 때문에 일자리와 복지 혜택을 빼앗긴다고 여기는 미국인들의 비율이 늘고 있다.
보호센터 관계자는 입소 현황을 공개하는 것을 거부했다. 다만 “보호센터는 투산에 있는 사람이라면 시민권자든 불법 이민자든 신분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인근의 또 다른 보호시설에서 기자는 아프리카 수단에서 내전을 피해 탈출한 뒤 멕시코를 통해 불법 입국한 이민자 따리끄(가명)를 만났다. 내전으로 부모를 모두 잃은 그는 기자에게 "도움이 필요하다. 일자리를 주선해줄 수 없냐”고 수차례 요청했다.
투산ㆍ노갤러스=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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