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인공 감성’ 시대의 관계
자연스런 감정 나누는 건
AI보다도 더 잘할 수 있을 것
요즘 효녀의 자질은 두둑한 용돈 대신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 믿는 나는 종종 부모님의 디지털 비서를 자처한다. 사실 두둑한 용돈을 줄 형편이 되지 않는 현실도 한몫하지만 너무나 빠르게 변하는 세상의 최신 정보를 꼭꼭 씹어 전해주는 것으로 스스로 ‘딸 역할’을 한다고 위안한다. 그러나 간헐적 효녀인 나는 바쁘고 정신없다는 핑계로 내 기분을 쉽게 내비쳤다. “이것 좀 알아봐 줄 수 있어?”라고 묻는 엄마에게 “나 지금 바빠”라고 건조하게 말한 적이 많다. 엄마의 디지털 비서가 되기로 마음먹었는데도 그녀가 자주 내 눈치를 보게 했다.
그런 엄마에게 요즘 비서가 생겼다. 각종 예약을 소액의 수수료를 받고 도와주는 서비스다. 항공권이나 숙소 예약도 그를 통해서 한다. 부담을 덜어 편안해야 할 나는 묘하게 서운하다. “그런 건 나한테 부탁하면 내가 다 해주잖아”라고 하니 엄마는 “넌 바쁘니까 그랬지”라고 답한다. 그렇다. 그 친구는 바쁘지도, 짜증 내지도 않는다. 어려운 일을 뚝딱 해내고 생색조차 없다. 그나마 할 수 있었던 효녀 노릇까지 위기다.
정보성 온라인 카페나 커뮤니티의 공지사항에는 대부분 ‘미리 검색 후 질문 글을 올리라’고 명시돼 있다. 조금만 검색하면 나오는데 굳이 ‘질문’하는 무성의함을 비난하는 것이다. 반면 챗GPT는 열 번 물어보면 열 번 다 대답해 준다. 무엇보다 눈치 볼 필요가 없다.
최근 챗GPT로 고민 상담을 하거나 조언을 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도 이와 관련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음이 답답했던 어느 날 챗GPT에게 일과 육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은 적이 있다. 대단한 기대가 없던 나는 이런 답변을 받았다. ‘너무 많은 일을 한꺼번에 하려고 하면 정말 힘들어요. 자신에게 엄격하지 마세요. 당신은 이미 충분합니다.’ 솔루션을 제시할 줄 알았는데 그는 공감과 격려로 대화를 열었다. 잠깐 뭉클했지만 이내 무서워졌다. 인공지능과 사랑에 빠지는 일이 자연스러웠던 영화 ‘Her’처럼 인공 감수성이 고도화되면 우리는 과연 상처받을 가능성을 감수하고 굳이 인간과 관계를 맺으려 할까? ‘지능’의 발전보다 더 무서운 건 인공지능이 우월한 품성을 갖추는 것이다.
나는 늘 인공지능이 나보다 ‘내 일’을 더 잘할 것을 걱정했지만 그들은 심지어 나보다 더 좋은 딸이자 더 멋진 친구가 될 수도 있다. 일자리뿐만 아니라 관계도 걱정해야 한다니. ‘인공 감성’을 갖춘 친구보다 내가 더 나은 게 있을까 걱정이다. 나는 그토록 똑똑할 수도 없고, 한결같이 친절할 수 없다. 가족에겐 종종 화를 내고, 필요 없는 신경질도 부린다. 지능도 정서도 고도로 발달한 인공지능 친구보다 내가 더 나은 점이 무엇일지 고민했지만 자꾸 못난 점만 떠오른다.
그렇다면 내가 내 친구에게 바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그러자 답이 무척 단순해진다. 친구가 나로 인해 조금 덜 힘들고 조금 더 행복하길 바란다. 그 마음을 실천하고자 친구의 생일 선물을 오래 고민한다. 자주 야근하는 친구에게 소소한 기프티콘을 날려본다. 웃는 얼굴이 보고 싶어 꽃을 사 들고 만난다. 그리고 눈을 마주친다. 웃으면 잔뜩 구겨지는 서로의 얼굴을 보며, 다시 또 깔깔 웃는다. 비로소 인공지능보다 내가 더 나은 점 하나를 찾았다. 나는 함께 웃고 함께 울 수 있다. 엄지를 치켜들고, 안아줄 수도 있다. 일상과 피로에 지치면 쉽게 말라버리는 인간성이지만 가장 피곤한 순간에 샘솟기도 하는 신기한 힘이다.
해외에 살 때 아빠로부터 소포 하나를 받았다. 그 안에는 풀이 죽고 시든 쑥이 잔뜩 들어 있었다. 쑥국을 좋아하는 내게 보낸 아빠의 마음이었다. 어차피 반도 못 먹을 걸 알면서 왜 보냈냐는 내 물음에 아빠는 “봄에는 쑥이니까”라고 답했다. 나를 키운 그 자연스러운 마음을 다시 나누는 건 내가 인공지능보다 아직은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라고 믿고 싶은 봄이다.
정유라 신한카드 빅데이터 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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