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민 지원 한국 선교사에 간첩혐의, 러시아의 인질 외교?
지난 1월 사상 처음으로 한국인을 간첩 혐의로 체포한 것과 관련해 러시아가 한국의 우크라이나 살상 무기 지원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전형적인 ‘인질 외교’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북·러 간 군사기술 협력 강화로 악화 일로를 걷고 있던 한·러 관계가 임계치에 다다르고 있는 모양새다.
전날 두 달 만에 한국인 체포 사실을 공개한 러시아 관영 타스통신은 12일(현지시간)엔 실명 공개 등 추가 보도에 나섰다. 타스는 이날 수사당국 관계자를 인용해 “체포된 한국인의 이름이 백광순(Пэк Кван Сун)”이라며 “백씨가 자신을 작가로 소개하며 국가 기밀을 받았다”고 보도했다. 이어 “백씨는 53세로 어린 자녀를 둔 기혼자”라며 “2020년부터 블라디보스토크에 사무실을 둔 여행사를 운영했다”며 구체적인 신상까지 공개했다.
타스통신은 “백씨의 형사사건 자료가 ‘일급 기밀’로 분류됐다”면서도 법원의 비공개 심리에서 나온 내용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정부와 사실상 한 몸처럼 움직이는 러시아 관영 언론의 특성을 감안할 때 정보를 조금씩 흘리면서 외교적 압박 수위를 올리고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은 러시아가 지난해 3월 간첩 혐의로 체포한 후 1년 가까이 구금 중인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 에반 게르시코비치 사건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지난해 4월 WSJ은 이 사건을 두고 “미국을 상대로 (외교적) 지렛대로 삼으려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백씨는 현재 게르시코비치와 함께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의 미결수 구금시설인 모스크바 레포르토보 구치소에 수감돼 있다.
체포·구금 후 두 달 만에 이 사실을 공개한 배경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지난달 초 방한한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아시아·태평양 담당 외무부 차관이 한국 고위당국자들을 두루 만나 한국의 의중을 파악한 후 러시아가 ‘행동’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한 전직 고위당국자는 “한·러 관계가 악화되는 상황에서 러시아의 외교 스타일을 보면 이번 사건은 이미 예견됐던 일”이라고 우려했다.
이와는 별도로 일각에선 백씨가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10년 넘게 탈북민을 지원해온 선교사였다는 사실이 전해지면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지원해온 북한에 ‘반대급부’를 준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타스는 “백씨는 독실한 신자라고 했으며 한국어 종교서적을 구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익명을 원한 정보 소식통은 “백 선교사는 71년생으로 오랜 기간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활동하며 북한 노동자들을 돕는 과정에서 붙잡힌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또 다른 소식통도 “간첩사건의 일환이라는 보도 내용을 볼 때 탈북민 구출과 관련된 사안일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의 ‘인질 외교’든, 북한에 주는 ‘선물’이든, 아니면 둘 다의 목적이든 이번 사건은 미국 기자 게르시코비치 사건과 마찬가지로 해결에 상당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여 우려된다. 외교부 임수석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정부로서는 우리 국민이 하루빨리 가족들의 품으로 안전하게 돌아올 수 있기를 기대한다”며 “한·러 간의 외교채널을 통해 소통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영교·이유정·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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