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은 연애도 허락받아야 하나…극성팬덤에 기댄 K팝 민낯 [박가분이 소리내다]
BBC·CNN도 '카리나 사과' 보도
가수 캐릭터와 사생활 분리해야
지난달 27일 4세대 인기 걸그룹인 에스파의 멤버 카리나와 배우 이재욱과의 열애 기사가 나왔다. 보도 후 양측 모두 열애를 인정하자 일부 팬들은 당혹스럽다는 입장을 보였다. SNS에서는 ‘카리나 블루(우울감)’를 호소하는 글이 잇달아 올라왔고, 일각에서는 “그룹의 리더인데 신중하지 못했다” “데뷔한 지 3년이 막 지났는데 벌써 열애설인가” 등 아쉽다는 반응이 올라왔다.
팬들의 불만은 가라앉지 않았다. 급기야 중국 팬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카리나의 소속사인 SM엔터테인먼트 사옥 앞으로 ‘팬들을 배신했다’며 카리나의 사과를 요구하는 트럭시위를 벌였고, 이어서 일부 한국 팬도 열애설 논란에 대한 당사자의 침묵을 질타하는 내용의 트럭시위를 벌였다.
시위 직후 카리나는 3월 5일 인스타그램에 자필 사과문을 올렸다. K팝의 인지도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된 만큼 논란은 BBC와 CNN 등 외신에도 보도됐다. 동아시아권 팬덤 문화가 생경한 서구권 외신은 ‘K팝 스타는 연애도 허락받아야 하는가’라며 이해하기 어렵다는 논조로 이번 논란을 보도했다.
과거 1~3세대 아이돌 그룹에서도 심심찮게 열애설이 터져 나왔지만 ‘트럭시위급’의 논란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연예인의 사생활에 대한 존중 의식이 높아진 지금 이 시점에 카리나 열애 보도가 이토록 격정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당황스럽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배경이 있다.
카리나의 교제 소식에 허탈감을 보인 팬들이 내비치는 생각은 ‘시기상조’론이다. ‘한창 성장해야 할 걸그룹이 첫 정규 앨범 출시와 월드 투어를 앞두고 논란을 터뜨린 것’에 아쉬움의 초점이 맞춰져 있다. 카리나가 소속된 에스파는 걸그룹 최다 초동(첫주) 판매 기록(169만 장)을 갖고 있다. 그런데 4세대 걸그룹 경쟁이 격화되면서
다른 그룹에 밀려날 것이라는 위기 의식도 작동했다. 중대 사건이 일어났음에도 열애설 보도에 1주일 늦게 반응했다는 점도 팬들의 주된 질타 지점이었다.
여기서 엿볼 수 있는 건 현재의 아이돌 팬덤 문화가 단순히 ‘자기만족적 소비’에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돌 팬들은 소속사 못지 않게 음원 성적, 앨범 판매량, 해외 흥행 등의 ‘실적’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앨범을 수십~수백장씩 사고 각종 굿즈를 구매한다. 차트 순위를 올리기 위해 음원 사이트나 유튜브에서 신곡을 계속 스트리밍한다. 이번 열애 사건에 대한 팬들의 반발은 중요 시즌을 앞두고 스캔들을 일으킨 선수를 질타하는 스포츠 팬덤에 비견될 수 있다.
중앙일보 유료화서비스 ‘더중앙플러스’의 기획 시리즈인 ‘걸그룹, 여덕을 홀리다’가 지적했듯, 아이돌 팬덤은 여성이 주도한지 오래다. 과거 오빠부대와 달리 이제 걸그룹도 주된 응원의 대상이다. 페미니즘의 성장과도 무관치 않다. 이들의 팬심에는 단순한 유사 연애감정을 넘어 응원하는 아이돌의 성공신화를 소비하고 싶다는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블랙핑크가 보여주었듯 K팝 그룹의 성공은 세계적 수준으로 확대됐다.
따라서 이들의 눈에 카리나의 열애 보도는 단순한 ‘사생활’ 문제가 아니라, 함께 감동적인 성공신화를 써 내려가고자 하는 공동의 환상을 무너뜨린 사건으로 비춰진 것이다. 상업적 성공과 자기계발에 대한 강박이 만연한 한국 사회의 씁쓸한 단면이라 할 수 있다.
아이돌 팬덤이 갖는 경쟁 심리는 남성 팬들이 많은 확률형 아이템 게임(가챠 게임)에서도 엿볼 수 있다. 게이머들은 매출 순위라든지, 인기 캐릭터의 과금 실적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게임에서 내가 좋아하는 미소녀와 내밀한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돈을 쓰는 게 필수이며, 이것이 게임산업의 비즈니스 모델로 자리 잡았다. ‘과금러’ 역시 게임산업을 지탱하는 핵심 소비자로 인식된다.
아이돌 산업에서도 동경하는 스타의 메시지를 1대1 채팅방으로 수신하고 답장을 보낼 수 있는 구독형 메시지 서비스가 확산됐다. 팬사인회에 응모하기 위해 앨범을 대량 구매하기도 한다. 스타와 팬 간의 소통에 과금적 요소가 강화된 셈이다. 이렇다 보니 ‘찐팬’을 자부하는 팬덤 사이에는 일종의 ‘주주의식’이 강화되는 경향이 있다.
당연히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나 가수도 누군가에게 연애 감정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것을 자유로운 상상의 영역으로 남겨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개별적 환상에 대한 몰입을 지탱하기 위해서라도 표면적으로 ‘성장’과 같은 ‘공동의 대의’를 지향한다는 식의 중립적 방향 설정이 필요하다. 일부 카리나·에스파 팬들이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그런 공식 설정의 붕괴, 게임에 비유하면 일종의 ‘캐릭터 붕괴’였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K팝 산업의 급속한 성장은 과몰입 없이는 불가능하다. 제한된 내수시장 탓에 소수 열성 팬덤의 구매력에 의지하게 됐다. 그럼에도 사생활 논란으로 상처받는 ‘실존하는 개인’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거대한 문화산업이어도 ‘자유로운 개인’을 존중해야 더욱 풍요로운 결실을 맺을 수 있다. 이번 사태는 급속한 성장을 한 K팝 산업에 물음을 던진다. 게임이나 영화 프롤로그를 보면 ‘실제 일어난 일에 영감을 얻었을 뿐 기본적으로 허구의 창작물’이라는 문구를 쉽게 볼 수 있다. K팝 산업에서도 가수가 상징하는 캐릭터와 살아 숨 쉬는 개인을 분리하는 ‘메타 인지’가 필요하지 않을까.
박가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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