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vs 영풍 ‘가문 갈등’…승자는 누구
3월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고려아연과 영풍 간 ‘가문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과 장형진 영풍 고문 등 두 집안의 대리인은 정관 변경과 배당금 증액 여부 등을 두고 치열한 공방전을 펼쳐 긴장감이 고조되고 있다. 두 집안 사이 지분 경쟁의 향방을 두고 재계에서는 여러 해석을 내놓는다.
국민연금, 캐스팅보트
3월 19일 예정된 고려아연 정기 주총을 앞두고 이 회사 최윤범 회장과 영풍 장형진 고문 일가 간 갈등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
두 집안은 주총 안건에서 배당안과 정관 변경안을 놓고 정면충돌했다. 고려아연은 이번 주총에 주당 5000원을 결산배당금으로 지급하고, 신주 발행 대상을 외국 합작법인으로 제한하는 현 정관을 삭제하는 안건을 상정했다. 다만, 액면 총액 400억원이라는 신주 발행 한도는 그대로 유지한다. 이를 두고 영풍 측은 배당금이 너무 적다며 주당 1만원으로 두 배로 올려달라고 주장한다. 정관 변경 시도에 대해서도 제동을 건다. 고려아연 바람대로 정관이 개정되면 국내외 투자자를 대상으로 제3자 배정 유상증자를 할 수 있게 된다. 영풍 측은 “3자 배정 증자가 가능하도록 정관 개정이 이뤄지면 기존 주주 지분 가치가 희석될 우려가 있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주주 입장에선 고려아연 안건대로 정관 개정이 이뤄지고 최 회장 측이 지배력 확대를 위해 국내외 투자자를 대상으로 증자를 단행할 경우, 희석 효과가 관건이다. 액면가로 400억원의 신주인수권은 약 800만주. 최근 시가에 비춰 약 3조6000억원(800만주×약 45만원)의 증자 효과로 추산된다.
두 가문 간 상호 반목은 꼬리를 물고 있다. 정관 개정을 두고 영풍 측이 반대 입장을 밝히자 고려아연 측은 영풍도 2019년 동일한 내용으로 정관을 변경했다고 반박한다. 고려아연은 “당시 영풍이 밝힌 정관 변경 목적은 ‘관계 법령 내용 반영 개정 및 조문 정리’로 고려아연이 밝힌 정관 변경 목적과 동일하다”며 “(영풍이) 자가당착에 빠졌다”고 날을 세웠다. 이에 대해 영풍 측은 “정관을 변경한 것은 맞지만 당시 정관을 변경한 것은 자본시장법에 따라 내용을 세분화하기 위해서였다”며 “문제가 되는 ‘신주 발행 대상을 외국 합작법인으로 제한하는 정관’은 영풍 정관에 없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배당금을 놓고도 정면충돌했다. 영풍은 고려아연의 배당 성향을 두고 “배당 성향이 높아진 것은 최근 경영 실적이 좋지 않아 수익성이 나빠진 데다 제3자 배정 유상증자, 자사주 맞교환 등으로 배당 대상 주식 수가 급격히 늘었기 때문”이라며 “시가배당률은 감소세”라고 말했다. 배당 성향은 배당금을 해당 연도 당기순이익으로 나눠서 구한다. 시가배당률은 주당 배당금을 현 주가로 나눠 구한다. 영풍 측 설명처럼 실적 부진으로 당기순이익이 줄면 배당금이 그대로여도 배당 성향이 좋아진 것 같은 착시 현상이 빚어질 수 있다. 시가배당률 역시 주가 하락으로 분모가 급감하면 마치 배당률이 좋아진 것처럼 비춰질 수 있다.
이에 대해 고려아연은 “시가배당률은 당일 주가 변동에 따라 수시로 변동되는 자료로 특정 기업의 주주환원 수준을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지표가 아니다”라며 “고려아연은 현재 7조4000억원의 이익잉여금과 1조5000억원 규모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어 배당 여력이 충분하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영풍은 4조원 가까운 잉여금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2022년 연간 배당금은 170억원대, 배당 성향은 고작 5%에 불과하다”고 역공을 폈다.
정관 변경 안건 표 대결은 영풍 승리가 높게 점쳐진다. 정관 변경 안건은 특별 결의 사항으로 출석 주주 3분의 2, 발행 주식 3분의 1 이상 동의를 얻어야 한다. 특수관계인·우호 지분을 모두 합쳐 최 회장 일가와 장 고문 일가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각각 33%, 32%다. 고려아연 주총 주주 참석률이 평균 85%(지분 기준) 수준이라는 점에 비춰 장 고문 측이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만으로도 반대 비율은 38% 정도다. 즉, 출석 주주 3분의 2 찬성이라는 요건을 충족시키기 어려워 부결 가능성이 높다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배당 안건은 우호 지분이 많은 최 회장 일가가 유리하다는 평가가 나오지만 캐스팅보트를 쥔 쪽은 국민연금이라는 분석이다. 배당은 일반결의로 출석 주주 과반, 발행 주식 4분의 1 이상 동의를 얻으면 된다. 출석률 85%에 약 8% 지분을 쥔 국민연금이 최 회장과 장 고문, 어느 쪽에 힘을 싣느냐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
시장에서도 세 대결 양상이 뚜렷하다. KCGI자산운용은 국내 기관 투자자 가운데 처음으로 영풍 측 지지 입장을 밝혔다. KCGI자산운용은 이번에 신설된 의결권 행사 기준을 바탕으로 신주인수권 정관 변경 안건에 대해서는 반대, 주당 1만원으로 결산배당을 지급하는 안건에는 찬성표를 던지기로 했다. KCGI자산운용 측은 “고려아연은 전체 유통 주식의 약 15%에 달하는 3자 배정 유상증자와 자사주 매각을 통해 일반 주주의 지분 가치가 희석돼왔다”며 “경영권 분쟁에서 한쪽의 손을 들어주는 차원이 아닌 주주 이익 원칙과 주식 운용본부 내부 기준에 입각해 의결권을 행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반면, 소액주주연대 플랫폼 액트는 고려아연 주주환원율을 높게 평가하며 최 회장 측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영풍, 고려아연 차입 늘자 불만
재계에서는 두 집안 간 갈등이 어떤 형태로 귀결될지 촉각을 곤두세운다.
당초 가문 싸움은 최윤범 회장 주도로 촉발됐다는 게 지배적인 시각이다. 고려아연이 속한 기업집단 영풍그룹은 공동 창업주 故 장병희·최기호 회장이 1949년 설립한 영풍기업사가 모태다. 2세대에서는 공동 창업주 자녀인 장형진 영풍 고문, 최창걸 고려아연 명예회장을 주축으로 영풍·전자 계열은 장 씨 집안, 고려아연은 최 씨 집안이 각각 담당해왔다. 크게 지분 구조상 장 씨 일가가 그룹을 소유하되 경영은 최 씨 일가가 맡는 식이다. 영풍과 고려아연은 모두 서울 강남구 논현동 소재 영풍빌딩을 본사로 쓴다.
그러면서도 두 집안은 상호 지분을 가지는 식으로 견제 장치를 뒀다. 고려아연 최대주주이자 영풍그룹 지주사인 ㈜영풍은 장 씨 집안 지분율이 50%를 넘지만, 최 씨 집안 지분도 13% 이상이다. 이런 이유로, 고려아연은 영풍의 관계회사로 분류된다. 통상 투자자가 유의미한 수준의 지분을 갖고 있지만 실질적인 지배력을 온전히 행사하는 데 제약이 따를 경우 이를 관계회사로 분류한다.
2022년 최창걸 명예회장 아들 최윤범 회장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진 뒤 양측은 고려아연을 둘러싼 첨예한 지분 경쟁을 이어오고 있다. 지난해 8월 고려아연 이사회가 ‘한화H2에너지 USA’를 대상으로 제3자 유상증자를 결의하면서 두 가문 간 갈등이 본격화됐고 1년 넘는 공방전이 시작됐다. 당시 한화H2에너지 USA는 4717억여원을 투자해 고려아연 지분 5%를 취득했다. 미국에서 동문 수학한 것으로 알려진 김동관 한화그룹 부회장과 최윤범 회장 간 인연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최 회장 일가는 한화에 이어 LG화학, 현대차그룹 등을 상대로 유상증자를 진행해 우군으로 확보했다.
재계에서는 최 회장의 공격적인 경영 성향을 장 씨 집안에서 탐탁지 않아 했을 것으로 본다. 고려아연은 본업인 제련 사업에서 벌어들이는 풍부한 현금흐름을 신재생에너지, 2차전지 소재, 자원순환을 비롯한 신사업에 투자한다. 2033년까지 신재생에너지와 수소에 8조3000억원, 2차전지 소재에 2조1000억원, 자원순환에 1조5000억원을 넣는 설비투자(CAPEX)를 단행한다. 고려아연에서는 이들 3가지 사업군을 묶어 트로이카드라이브(TD) 사업으로 부른다. 최 회장은 TD 사업을 고려아연 ‘제2의 도약’ 기반으로 삼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장 씨 집안 측에서는 최 회장이 TD 사업에 드라이브를 걸면서 차입을 활용한 투자가 늘고 있다는 점을 마뜩잖게 바라보는 것으로 알려진다. 고려아연은 타인 자본 의존도를 높이지 않고 부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기업으로 잘 알려진 곳이다. 지난해 3분기 말 기준 부채비율이 25%에 불과하다. 차입금비율, 순차입금비율도 각각 9%, 2%에 그친다. 차입금보다 현금성 자산이 많은 사실상의 무차입 경영을 이어왔다. 최 회장 체제에선 차입금을 적극 활용하는 식으로 자금 조달 기조 변화가 뚜렷하다.
결국 자기자본을 기반으로 안정적인 사업을 이어온 경영 기조를 유지하면서 배당금 등 현금 유입을 바라는 장 씨 집안 측과 사업 다각화를 원하는 최 회장 일가 간 억눌린 갈등이 폭발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영풍, 계열 분리 실익 없어
가족 합의 없인 양쪽 모두 상처
재계에서는 1949년 동업을 시작한 영풍 장 씨와 고려아연 최 씨 집안 간 계열 분리가 난제 중 난제로 본다.
무엇보다 영풍 측이 쉽사리 계열 분리에 응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영풍과 고려아연 간 손익계산서를 비교하면 계열 분리 현실화 땐 영풍 측이 잃을 게 훨씬 많다는 게 지배적인 평가다.
고려아연은 영풍 관계사로 지분율에 비례해 영풍 실적에 반영되지만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영풍은 고려아연 지분 24.8%(지난해 3분기 기준)를 보유하고 있다. 지난해 3분기 누적 연결 기준 영풍은 535억원의 영업손실을 봤다. 하지만 당기순손익은 687억원으로 흑자를 냈다. 본업에서 큰 이익을 못 냈지만 이자수익과 외환차익, 지분법손익 등으로 흑자를 본 것이다. 결정적 요인은 고려아연이다. 같은 기간 고려아연은 연결 기준 당기순이익 3403억원을 기록했다. 영풍은 고려아연 지분율에 비례해 933억원의 지분법손익을 실적에 반영했다. 2020년부터 2022년까지 지난 3년간 영풍이 본업으로 번 이익(영업이익)이 지분법손익보다 많은 해도 없었다.
영풍이 고려아연으로부터 받는 배당금도 남다르다. 2022년에는 고려아연 배당금으로 총 1039억원을 받았다. 본업 부진을 만회하는 핵심 요인 중 하나가 고려아연으로부터 받는 배당금이다.
반면, 고려아연은 영풍과 얽히고설킨 관계에서 얻는 이익이 거의 없다. 고려아연은 영풍 지분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지분이 없으므로 지분법손익, 배당금수익 등을 기대할 수 없다. 영풍의 종속회사 대부분은 인쇄회로기판 사업을 하고 있어 사업적 시너지도 불투명하다. 오히려 고려아연은 영풍으로부터 매년 1000억원이 넘는 원재료 등을 매입해 영풍 매출 기여도가 높다. 영풍이 고려아연에 제품과 서비스 등을 매입하는 규모는 미미하다.
정리하면, 고려아연 계열 분리 땐 영풍 입장에서는 현금 배당을 포함해 최소 수천억원을 포기해야 한다. 뒤집어 말하면, 고려아연 입장에선 수천억원대 이익을 누리는 장 씨 일가와 달리, 사업적 시너지가 별로 없는 데다 신사업에도 제동을 걸어 현 공동 경영 체제로는 득보다 실이 많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재계 관계자는 “수익에 집착하는 전문경영인과 달리 오너들은 손해에 매우 민감한 속성을 보인다”며 “계열 분리로 장 씨 집안이 잃게 될 손해가 수천억원인데 영풍 경영진은 물론 이사회, 주주들을 설득할 명분이 빈약하다”고 지적한다.
현실적으로 고려아연을 영풍그룹에서 분리하기도 쉽지 않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계열 분리를 하려면 특수관계인의 주식 보유 비중을 상호 3% 미만(상장사 기준)으로 줄여야 한다. 겸임 임원이나 채무 관계도 정리해야 한다. 최근 고려아연 시총은 9조원대다. 장 씨 집안 지분을 되사려면 경영권 프리미엄을 얹어 단순 계산으로 최소 3조원 이상 현금이 필요하다. 투자은행업계 관계자는 “통상적인 경영권 프리미엄을 넘어 미래 배당 가능 이익의 상당 부분을 경영권 지분에 반영해줄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며 “경영권 확보를 위한 목적만으로 이런 거래를 했다간 주주 간 배임 의혹으로 확산할 수 있어 성사 가능성이 매우 낮은 시나리오”라고 지적한다.
이 탓에 일각에선 두 집안 간 합의를 통한 주식 교환으로 결국 갈라서기를 하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최 회장 일가가 보유한 영풍 등의 지분을 장 고문 일가에 넘기고, 그 대가로 장 고문 일가로부터 고려아연 지분을 받을 것이라는 시나리오다. 대형 로펌의 한 기업 전문 변호사는 “가족회의를 열고 지분 정리 계획을 합의한 뒤 계열 분리를 신청하는 것이 통상적인 절차”라며 “이게 아니라면 집안끼리 끝없는 지분 경쟁을 벌여야 하는데 고려아연 규모 회사라면 최소 조 단위 자금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서 후유증도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50호 (2024.03.13~2024.03.19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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