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아래 펼쳐진 한 줌의 인간세상”… 장쾌한 붓질에 압도

손영옥 2024. 3. 12.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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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순회 기념전 ‘소산비경’ 갖는 한국화가 박대성
한국화 화단에서 ‘법고창신’의 대명사로 통하는 원로 박대성 작가가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해외순회 기념전 ‘소산비경’을 열고 있다. 작품 사진은 ‘현율’(2024, 종이에 수묵, 239.2×296.5㎝). 가나아트센터 제공


하늘에 닿듯 까마득히 치솟은 사각의 바위기둥들. 붓에 먹을 묻혀 여러 번 힘차게 내리그은 적묵의 바위기둥 발치에는 거대한 자연 아래 한 줌 개미 같은 인간 세상을 상징하듯 소담한 집이 소략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새처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선과 아래서 꼭대기를 올려다보는 시선이 한 화면에서 소용돌이친다. 한국화가 소산(小山) 박대성(79)의 작품 ‘현율(우주의 질서라는 뜻)’은 전통 동양화에서는 보이지 않는 올려다본 시점 즉, ‘앙시’로 자연의 위대함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독보적이다.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해외순회 기념전 ‘소산비경(小山秘境)’을 진행 중인 박대성(사진) 작가를 지난 6일 전시장에서 만났다. 마침 유흥식 추기경이 방문해 작가의 안내를 받으며 작품을 감상하고 있었다. 1시간이 넘게 작품을 꼼꼼히 살펴본 추기경을 두고 박 작가는 “역대 최장 시간 관람자”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이번 전시는 2022년 독일, 카자흐스탄, 이탈리아 한국문화원을 시작으로 미국 로스앤젤레스 카운티미술관(LACMA·라크마), 케임브리지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센터, 하노버 다트머스대 후드미술관, 뉴욕주립대학교 스토니브룩 찰스왕센터 등 지구촌을 돌며 총 8곳에서 순회전을 가진 걸 기념해 마련됐다.

박 작가는 1984년 39세의 나이로 신생 가나아트 갤러리의 1호 전속 작가가 됐다. 가나아트로서는 1호 전속 작가가 40년 세월과 함께 거목이 돼 글로벌 작가로 활동하는 걸 자축하는 의미도 깔렸을 것이다.

‘화우’(2024, 종이에 수묵·채색, 100×80㎝). 가나아트센터 제공


전시에서는 전통 수묵을 시대에 맞게 현대화하기 위해 그가 기울인 노력을 볼 수 있는 다양한 작품을 확인할 수 있다. 길과 폭포 등에는 색을 칠하지 않고 여백을 그대로 두는 전통의 방법을 활용하면서도 연못의 물결을 패턴화하거나 버드나무를 디자인적으로 평면화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통해 현대적인 수묵화 맛을 동시에 내고 있다.

첫 전시 장소인 라크마는 서부권 최대 규모 미술관으로 미국 전체 순회전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됐다. 전시가 두 달 더 연장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박 작가는 라크마 전시 때 현지 관람객으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작품이 ‘현율’이라고 했다. 라크마 전시를 하기도 전에 개인 소장가에게 팔린 상태여서 서울 전시에는 신작을 그려 냈다고 한다. 박 작가는 현율을 두고 “제가 환골탈태해서 그린 그림” “새로운 (조형) 언어를 탄생시킨 것”이라며 강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현율 연작은 2000년대 들어 탄생했다. 현대미술의 심장 뉴욕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됐다. 이전까지 그는 한국의 실경 산수를 수묵 채색으로 장쾌한 붓질로 표현했다. 화폭의 스케일, 색채 표현에서의 기세는 수교 전에 이건희 당시 삼성 회장의 배려로 중국을 방문해 만난 중국 근대 수묵의 거장 이가염의 영향이 컸다.

“하도 현대미술, 현대미술 하니까, 나도 1994년부터 뉴욕에 가서 1년을 지냈어요. 엄청나게 높은 빌딩들이 솟아 있는 뉴욕 맨해튼의 마천루 사이로 달이 걸려 있지 뭡니까. 부드러운 곡선의 산에 걸린 달과 느낌이 완전히 달랐어요. 동양화에서는 직선이, 특히 강한 직선이 없잖습니까. 폭발하듯이 치솟은, 거대한 직선의 빌딩 사이로 뜬 달을 보며 받은 강렬한 느낌을 이 ‘현율’에 담았습니다.”

‘백록담’(2024, 종이에 수묵·채색, 100×80㎝). 가나아트센터 제공


그러니 화폭 속에서 부챗살처럼 퍼지는 깎아지른 직선의 바위는 21세기의 우리가 도심 ‘빌딩 숲’에서 살아가는 모습의 은유인 것이다. 인간을 둘러싼 세상의 풍경이 달라지니 동양화 역시 조형 언어가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스스로 “오늘날의 수묵화를 내가 주도하게 됐다”고 말하는 자신감은 선배 세대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 보냈을 불면의 밤이 축적된 결과일 테다. “내 그림은 중국의 수묵, 조선 시대 수묵과 다르잖아요!”

라크마 전시가 성사된 과정을 물었더니 이야기가 2004년 리움 미술관 개관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리움 개관전에 온 영국박물관장 등 해외 큐레이터와 미술관 관장들이 한국 작가를 조사해 5명인가, 7명인가를 추렸다. 나한테도 연락이 왔다. 경주 화실로 작품을 보러 90명이 왔다. 그때 대작 몇 점이 팔렸다”고 했다. 그의 작품은 태평양 건너 샌프란시스코 부호 컬렉터 집에 걸리게 됐다. 그 컬렉터의 주선으로 라크마 미술관에 박대성 작가의 작품을 보여주는 특별실이 마련됐다. 이후 소속 큐레이터의 제안으로 대규모 개인전이 마련된 것이다.

개인전 제안이 왔을 때도 내심 내키지 않았다고 했다. 경주 화실로 찾아온 큐레이터가 작품을 선별하는데 작가와 이견이 있었던 것이다. “(가나아트 창립자인) 이호재 회장이 라크마에서 개인전을 한 한국 작가가 지금까지 없었다. 이건 기적이다. 무조건 해야 한다고 했다”며 에피소드를 전했다.

이번 순회전을 하며 다트머스대의 김성림 교수 주관하에 네 개의 대학이 전시와 연계하여 영문 도록이 발간됐다. 평론집 형식의 이 도록은 한국화 작가를 미술사적으로 분석한 최초의 영문 연구서다. 24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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