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처럼 살지 않겠다는 다짐, 그 후...

단단 2024. 3. 12.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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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에 들려주고 싶은 나, 여성, 노동자 ③-1] 내가 '우리'가 되기까지

[단단]

나의 성장기의 화두는 '아버지'다. 어린 시절, 아버지로 인해 나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여겼다. 우리 가족 구성원 모두가 그랬다. 맥락도 알 수 없는 명령과 불복종에 대한 폭력들이 난무했다. 유년기의 나에게는 그래서 '기호'가 없었다. 아니 없었다기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내 기호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아버지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들은 누구도 자기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감정 표현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그것이 때로 아버지의 폭력을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이 어떤 맥락에서 아버지의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했다. 예측할 수 없는 동기로 일어나는 폭력은 무력감을 발생시킨다. 당시 우리 가족은 모두 무력감과 우울감에 시달렸다. 어린 시절의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친구는 무뚝뚝한 아버지에 대한 불평을 늘어놓는 친구였다.

당시의 아버지는 자신이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고 믿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와 삼촌이 연이어 돌아가시고 삼촌의 투병에는 많은 비용이 들었다. 일곱 살의 나는 밤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매일 만취해 들어와 울부짖는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영리해 동생 넷을 업어 키우면서도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던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 아래에서 생기를 잃어갔다. 똑똑하고 아름답던 어머니는, 성실하고 활기찼던 어머니는, 날이 갈수록 주눅 든 얼굴로 울거나 울먹이는 시간이 많아졌다. 나는 그런 어머니 곁에 누워 덩달아 숨죽여 울거나 울먹였다. 나는 내 베개 커버를 벗겨 세탁할 때마다 커져있던 눈물 얼룩에 대해 어머니가 그 이유를 물을까봐 늘 조마조마해했지만, 어머니는 한 번도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아버지와 같은 사람은 절대 만나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나는, 20대 초 첫 애인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다. 연애는 그간 경험해 온 인간관계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속박되어야 했다.

처음엔 그게 썩 나쁘지 않았다. 전형적인 보호주의적 마초였던 첫 애인은 내게 다양한 경험들을 선물해주었지만, 내가 통제되지 않자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내가 그 순간 떠올린 것은 바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그늘에서 비로소 벗어나게 해준 당사자가 또 다른 아버지로 나를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온몸의 피가 타 들어가는 것 같은 공포를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와 헤어지기를 원치 않았다. 통제적 관계는 오래 지속되면 의존적 형태를 띠게 된다는 것을 그때 처음 경험했다. 이후의 연애 관계들도 유사한 형태였다. 폭력이 동반되지 않아도 통제적 관계는 유지되었다.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다짐은 현실 속에서는 환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분노의 방향
 
 20대 내내 전전했던 한 평 남짓한 원룸 중에 유독 창이 작은 방에 살 때였다. 신림동이었고 지대가 낮은 곳의 1층이었는데 그 작은 창으로 볕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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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의 나는 돌이켜보면 형체가 불분명한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폭력적인 아버지에 대한 분노, 느닷없이 맞닥뜨린 애인의 폭력에 대한 분노, 홈리스, 비정규직, 매일같이 마주치는 가난에 시달리는 노인들을 보며 사무치는 이 사회구조에 대한 분노, 분노, 분노.

20대 내내 전전했던 한 평 남짓한 원룸 중에 유독 창이 작은 방에 살 때였다. 신림동이었고 지대가 낮은 곳의 1층이었는데 그 작은 창으로 볕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방 바로 옆 주차장의 매연은 꼬박 들이쳤다. 오며가며 만났던 굽은 허리의 키가 작은 할머니는 하루 종일 그 근방에서 폐지를 주웠다. 내가 그곳에 살기 훨씬 전부터 그랬던 것 같았고 늘 쉼 없이 일했지만 할머니는 가끔 길에서 잔다고 했다.

당시의 나는 가끔 음료를 하나씩 사서 할머니와 나누어 마시면서 할머니의 빈곤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게 되었지만 나 혼자서는 무엇도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나는 매연냄새가 새어 들어오는 골방에 앉아 가끔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대고 잠들 할머니를 생각했다. 나는 어렸고 분노의 방향도 명확하지 않았지만 선명하고 또렷한 분노와 무력감 사이를 매일같이 오갔다.
  
낭떠러지 앞에서 걸어 나오다

지금 생각해보면 잔뜩 부풀기만 한 그 분노에 떠밀려 '운동'이란 것을 시작했던 것 같다. 처음 진보정당에 들어가 활동하면서 불분명한 형태의 분노가 구체적 저항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밟았지만, 그 운동사회 내에서도 여러 번의 성폭력을 경험했다. 사건화하여 가해자의 징계를 받아낸 사건들은 결과적으로는 해결되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결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각각의 사건 모두 나의 에너지와 시간, 건강을 갉아먹었다. 30대에 갓 들어섰을 무렵, 이 모든 것들이 류마티스 관절염이라는 면역 질환으로 나타났다. 통증이 극심해 일상생활이 유지되지 않아 활동을 2년간 활동을 그만둬야 했다. 성폭력 가해자와 오랜 소송을 하는 동안 질병은 악화되었고, 내가 사랑해마지않았던 할머니의 죽음과도 대면해야 했다. '고통'이 인간을 어디까지 몰아붙일 수 있는지 알게 되었다. 늘 낭떠러지를 한 발짝 뒤에 두고 살아가는 기분이었다.

이 과정들은 모두 나에게 상흔만을 남기지는 않았다. 무엇보다 당시의 나는 10대의 나처럼 무력하진 않았다. 낯모를 여성들이 낯모르는 나를 위해 손을 내밀었다. 가해자들은 나의 일상을, 세계를 모두 무너뜨리기 위해 애를 썼지만 나는 연대하는 이들의 손을 단단히 붙들고 그 모든 과정에 맞서 싸웠다. 나는 무너지지 않았고, 나의 일상을 탄탄히 지키는 방법을 배워나갔다. 그 모든 과정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나의 전 생애를 지배하고 있던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그녀들이 내미는 손을 잡고 낭떠러지 앞에서 조심조심 걸어 나왔다.

이어지는 기사 : 아버지부터 남편 폭력까지... 그녀에게 해방감 준 '공간'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단단은 공공운수노조 조합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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