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삑삑 – 행복하세요”…동방예의지국의 소리(?) [조남대의 은퇴일기㊼]

데스크 2024. 3. 12.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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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서 이동할 때는 주로 전철을 이용한다. 특히 목요일에는 선릉역 부근의 사무실에 들렀다가 점심 후 전철을 타고 종로3가역에서 내려 운현궁 부근 수필 공부하는 곳으로 걸어간다. 왕복 다섯 코스를 족히 3시간 전철 신세를 진다. 어르신이라는 이유로 상냥한 여성의 인사까지 받으며 무료로 이용하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세상인가.

지하철 역사에 게시된 부정승차 단속 플래카드

서울지하철을 타기 위해 개찰구로 들어가 교통카드를 태그 하면 삑삑 소리와 함께 "행복하세요"라며 인사한다. 요즈음처럼 경로사상이 희박한 시기에 이용할 때마다 상냥하게 인사를 받으면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그렇지만 않은 것은 왜일까. 출퇴근 시간 옆에서 같이 이용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왠지 미안하고 창피하기도 하다. '노인들은 좀 한가한 시간에 이용하지 붐빌 때 나와 더 복잡하게 하느냐'는 젊은이들의 불평이 들리는 듯하다. 처음에는 삑삑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는데 정상적인 요금을 내고 이용하는 카드는 삑 소리가 한 번만 나고, 어르신 교통카드는 두 번 울린다는 것을 동료에게서 들었다. 그 이후부터는 정당하게 받은 교통카드이지만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불편했다. '왜 내가 젊은이들로부터 눈치를 받으며 전철을 이용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신용카드로 요금을 지급하면서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자주 이용하다 보니 그 요금도 만만치 않아 어르신 교통카드를 다시 이용한다.

지하철 탑승구로 들어가는 어르신

소리만 나던 교통카드가 어느 날부터는 "행복하세요"라며 인사까지 한다. 왜 이렇게 중복으로 소리를 내면서 노인이라는 것을 표시 나게 하는지 궁금하여 지하철 역무실을 찾아갔다. 직원은 어르신 교통카드의 부정 사용을 방지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란다. 자녀들이 교통비를 아끼기 위해 부모 카드를 이용하는 등 부정승차 비용이 연 500억 원이나 된다고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개찰구 부근에서 직원들이 근무하다가 젊은 사람이 통과하는데 삑삑 소리나 "행복하세요"하는 음성이 들리면 신분증 검사를 하는 등 부정 사용 여부를 확인한단다. 그러면서 지하철 적자가 일 년에 2천억 원이나 발생한다며 그 원인이 어르신교통카드 때문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왕 운행하는 지하철에 어르신들이 탔다고 비용이 추가로 발생하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지하철 적자를 경영합리화 등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지 어르신들이 이용하는 것 때문이라는 것은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65세 이상 어르신들의 지하철 무임승차는 2012년 9월 1일 시작되었다. 그동안 국가와 사회 발전에 이바지한 노인에 대한 일상생활의 편의를 제공하고 경로 효친의 미덕을 기리기 위해 시행하였다. 노인층의 건강과 생활 편익 효과는 연 4천억이 넘는다는 연구 보고도 있다. 낮 시간이면 어르신들의 이용률은 더욱 높아진다. 아마 절반도 넘을 것처럼 보인다. 전철 개찰구를 지날 때면 "행복하세요"라고 인사하는 소리로 시끄러울 지경이다. 무임승차가 가장 많은 지역은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탑골공원이 있는 종로3가역으로 무려 하루 31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종로3가역에 내리면 어르신들이 많다는 것을 금방 피부로 느낄 수 있다. 역 승차장 주변에도 보청기 등 대부분이 어르신들이 이용하는 물품을 판매한다.

종로3가역 대합실 주변에 있는 보청기 가게
종로3가역 주변 인도 좌판에서 중고물품을 판매하고 구경하는 모습

출구를 나와 탑골공원으로 가는 길 인도에는 옷이나 신발, 가방, 안경, 허리띠 같은 중고물품을 판매하는 좌판이 즐비하다. 탑골공원 뒤편 길거리에는 장기를 두는 사람과 이를 구경하는 어르신들로 북적인다. 이분들도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를 들으며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주변 음식점도 대부분 국밥이나 순댓국 같은 어르신들이 좋아하는 식당이다. 또 점심시간이면 한 끼의 무료식사를 위한 줄이 골목에서 이어져 탑골공원 안까지 기다랗다. 송해길이나 주변에는 식당, 극장, 이발소나 커피숍도 주머니가 가벼운 어르신들이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도록 다른 곳보다 저렴하다.

종로3가역 송해길 입구 모습

종로3가역에서 내려 골목길을 거쳐 익선동에 있는 한국문인협회 평생교육원 수필반에 도착한다. 여기에도 대부분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를 받으며 오신 분들이다. 수필반 총무를 비롯한 몇 명 외에는 모두 지공선사다. 왕년에는 교수나 교사, 회사 임원, 고위공무원 같은 직책을 지냈던 분들이지만 이제 의자를 후배들에게 물려주고 제2의 인생을 의미 있게 살아가고 있다. 대부분 등단하고 수필집을 몇 권씩 낸 수필 분야의 대가들이다.

한국문인협회 수필반에서 수업하는 모습

이곳에서는 과거 직책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오직 글을 잘 쓰는 작가가 부러움의 대상이다. 1시간 반 수업하는 동안 수필 3편 정도 합평하면 적절한데 열댓 명 되는 문우들이 매시간 글을 써 와서 지도하는 교수님이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된장이나 김치가 익을수록 맛이 나듯이 칠팔 십대의 나이에도 어디에서 그런 열정과 수려한 문장이 나오는지 경외의 눈초리에 입이 벌어진다. 젊은 문우들이라고 듣고만 있지 않는다. 시와 수필이 접목될 정도의 은유적이거나 새로운 풍조의 글은 비록 설익은 듯하지만 발랄하고 경쾌한 필치에 눈이 커진다. 어르신들이 앞에서 이끌고 좀 더 젊은 지공선사들이 뒤에서 받쳐주는 수필반이라 문우들 실력이 나날이 업그레이드되는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하다.

수필반 학생들이 수업 마친 다음 환담하는 모습

세월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언제나 청춘인 것 같았는데 눈 깜작할 사이에 의자를 물려주고 내려온 어르신들이다. 길거리에서 바둑 두는 것을 구경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수필반에 나와 공부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으니 얼마나 보람된 것인가. '내가 왜' 하며 버티고 싶지만, 세월의 무게로 인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다. 젊은이들이 우리에게 그래 주었듯이 나도 당신들의 떠오름과 저묾의 순간을 함께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젊은 세대가 지공선사가 되었을 때 '우리 근사하게 저물자'라고 말해주는 쿨한 어른이고 싶다. 그래도 동방예의지국의 유산을 이어받은 경로사상으로 인해 '행복하세요'라는 인사를 들으며 전철을 이용할 수 있으니 얼마나 고맙고 다행인가.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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